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로부터 머지않아 ‘극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지난 3월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다.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더불어, 원자력 규제를 담당하는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원자력 진흥을 추진하는 경제산업성 산하에 있는, ‘비독립적인’ 원자력 안전 규제 체계가 피해를 확산시킨 주범으로 지적됐다. 돌아보니 우리나라도 별다를 게 없었다. 원자력 규제와 진흥을 담당하는 기관과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있어 이른바 ‘마피아’ 집단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IN〉이 제186호 표지 기사로 보도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자력 안전 규제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론이 일자,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정부와 한나라당은 대통령 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원자력법 개정 추진안을 6월 내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오는 9월부터 시행하기로 협의했다. 기존 교과부 산하 자문기관으로 설치돼 있던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격상해 안전 규제의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42쪽 표 및 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이렇게 관련법만 정비하면 그간 지적돼오던 ‘원자력 마피아’의 문제가 사라지고 우리나라 원전도 훨씬 안전해질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장군현 지부장(52)이다. 장 지부장은 “정부안대로 원자력 규제 독립안이 추진되면 형식적 독립에 그칠 뿐 아니라 오히려 원자력 안전이 더 위협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몸담은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은 원자력의 방사선 재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자 설립한 교과부 산하 준정부기관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 심사는 물론이고, 일본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는 매일 전국 방사능 수치를 검사하고 분석해 발표하는 등 국내외 원자력 안전에 관한 실무를 맡아왔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자력 안전 규제 전문기관의 내부 종사자가 정부의 이번 개정 추진안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왜 그럴까?
규제 기관의 독립성을 높인다는 취지의 원자력 관련법 정부 개정 추진안에 반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관련법 개정 취지에는 동감한다. 하지만 원자력 규제 체제의 독립성은 단순히 원자력안전위원회만 격상해 따로 설치한다고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 독립을 위해서는 원자력 안전을 담당하는 행정 관료 집단과 공학적 전문가 집단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껏 공학적 전문가 집단으로서 원자력의 안전 업무를 담당해왔던 KINS는 원자력의 규제와 진흥을 동시에 담당하는 행정 관료 집단인 교과부에 지나치게 종속돼 있었다. 이런 구조를 고치지 않고서는 규제 기관의 실질적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KINS가 교과부에 종속됐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이 뭔가?
왜 시키는 대로 보고서 내용을 바꿔야 하나? 구조적으로 KINS 직원들은 교과부 직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법적 업무가 없이 모두 교과부에서 위탁한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KINS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법이라는 법률적 근거 아래 설립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업무가 없다. 현행 원자력법 111조에 따르면 KINS의 위탁 업무는 관보(국가의 공보 기관지)에서 확정하게 돼 있다. 교과부에서 우리에게 업무를 주고 싶으면 관보에 싣고 다음 날 마음이 변하면 관보 내용을 바꾸면 된다. 당신들 말고 다른 곳에 업무를 준다고 눈치를 주면 보고서 내용이 안 바뀔 수가 없을 것이다.
KINS가 원자력안전위원회 사무처(지금은 교과부 원자력안전국) 산하로 가는 정부 개정 추진안은 적어도 ‘현상 유지’ 아닌가? 지금보다 종속성이 더 심화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제껏 우리 KINS는 교과부의 ‘시다바리’였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었다. 원자력 안전 규제에 관해 우리가 정책 결정은 못 내린다 해도 실무적 업무는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안대로 바뀌면, 대통령 직속위원회의 사무처가 된 교과부 원자력안전국이 안전 규제 실무를 직접 담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권한이 세진 사무처 산하에서 지금처럼 관보에 의해 업무가 위탁되는 KINS는 더더욱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마음에 안 들면 업무를 가져가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의 원자력안전기반기구(JNES)는 ‘체크 리스트’ 검사(합격·불합격으로 안전성 여부를 심사하는 방식)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쿠시마 사고 후 그곳 원자력 보안관들이 현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체크 리스트 이상의 경험과 안전 평가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업자인 도쿄전력에 다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교과부는 지금껏 계속 KINS에게 원자력 안전 검사를 할 때 체크 리스트를 사용할 것을 요구해왔다. 안전 문제는 그렇게 이분법으로 평가할 게 아니라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 아래 지금까지는 KINS가 그 요구에 버티고 기존 서술적 형식의 ‘포괄적 검사’를 수행할 수 있었는데, 정부안대로 교과부 원자력안전국(원자력안전위원회 사무처)의 힘이 세지면 이제 그마저도 어려울 것이다.
사무처가 아무리 힘이 막강한들 실질적 정책 결정은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들이 할 것 아닌가? 정부 추진안대로라면 그들의 자격 요건도 강화되는데…. 위원회는 사무처에서 보고한 자료에 따라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상근 위원이 있다고 하지만 2명에 불과하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위원회 위원이 누가 되고 그들이 어떤 자료를 제공받는가에 상관없이 원자력 안전에 관한 공학적 관점이 밑에서 다시 한번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중삼중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놓아야 제대로 원자력 안전을 강화할 수 있다.
아무리 눈치가 보여도 KINS 직원들이 공학자적 양심을 지니면 되지 않나? 1999년 KINS의 김상택 연구원이 울진 1호기의 미확인 용접 부위를 보고했지만 상부에서 묵살당했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한 적이 있다. 당시 KINS는 발칵 뒤집혔다. 결국 김 연구원은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았다. 그런 일들을 보고 누가 선뜻 나설 수 있겠나? 솔직히 나도 김 연구원처럼 되기 싫다. 직무상 비밀누설죄만 갖다 대면 다 걸리게 돼 있다. 사실 원자력 분야에선 내부 고발자가 없으면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원자력법을 개정할 때 원자력 안전에 관한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조항을 넣었으면 좋겠다. 또 신설되는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 중 익명성 민원 조사권·고발권·국회 보고권을 지닌 ‘옴부즈맨 상임위원’을 두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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