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6일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옛 미군 기지 캠프 페이지로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출입구 너머로 보이는 부지를 포클레인이 파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여느 공사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탱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CAMP PAGE’라는 글자만이 미군 기지였음을 알려주었다.

입구에서는 공사장 관계자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기자들의 드나듦이 자유로웠던 캠프 페이지는 ‘칠곡 고엽제 파문’ 이후 출입이 통제되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지방지 기자는 “평상시에는 춘천시에 이야기하면 현장에 쉽게 들어갔는데, 오늘은 군에서 나와 통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사이 버스 한 대가 옛 캠프 페이지 부지로 들어갔다. 환경오염 정화사업 견학을 온 주민 40여 명이 탄 차였다.

2005년 반환된 캠프 페이지는 현재 한라건설 컨소시엄이 정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체 부지 64만여㎡ 중 오염된 4만8000여㎡를 대상으로 정화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캠프 페이지는 1958년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춘천에 유도탄기지 사령부와 미국 군사고문단 등이 주둔하면서다. 


ⓒ시사IN 조남진캠프 페이지는 2009년부터 환경오염정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기지는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해 5월5일 오후 2시, 랴오닝성 선양을 출발한 여객기를 중국인 6명이 납치해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시켰다. 사건 초기 우리 정부는 불시착 이유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미군 시설이라는 이유로 접근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한국 속 이국 땅’ 캠프 페이지는 2005년 다시 주목을 끌었다. 당시 최성 의원(현 고양시장)이 미국 정보공개 청구 자료를 인용해 이곳이 핵무기 기지였음을 국회에서 처음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한 미군의 핵무기 보유 여부는 심증만 있었지 물증이 없었다. 핵무기 존재 여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미국의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 때문이었다.

앞서 1999년 국내 핵무기 배치 자료가 일부 공개되었다. 미국의 〈원자력과학자 회보〉 (Bulletin of Atomic Scientists)가 미국 국방부 보고서를 분석해 한국 등에 핵무기가 배치되었음을 보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 핵무기 배치는 1958년 1월에 시작했다. 〈시사IN〉 인터뷰에 응한 스넬 씨가 사고가 났다고 주장한 바로 그 어니스트 존 미사일이 이때 처음 배치되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어니스트 존 미사일을 시작으로 1991년 11월 ‘국가안보명령 64’에 따라 핵무기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핵무기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에도 정확한 핵무기 기지 위치는 공개되지 않았다.


1972년 한국에 핵무기 684개 배치

2005년 최성 의원이 미국 국방부와 국무부 자료를 바탕으로 캠프 페이지, 캠프 에임스 등 주한미군 기지 16곳에 핵무기가 배치됐다고 폭로했다(오른쪽 그림 참조). 이때 최 의원은 캠프 페이지 로고가 붙은 〈한국무기지원단(WSD)-한국 핵작전 표준절차〉라는 기밀문서(50쪽 아래 사진)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문서에는 캠프 페이지의 핵무기 입고 절차와 이동 시 매뉴얼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2월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는 미국 국방부가 1978년 2월 작성한 기밀문서 ‘1945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핵무기 배치 역사’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스넬 씨가 겪은 핵무기 사고가 난 1972년 한국에는 핵무기 684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최 의원 폭로에 앞서 2005년 4월부터 7월까지 약 3개월간 캠프 페이지에 대한 환경조사가 이뤄졌다. 2001년 SOFA(한·미 주둔군지위협정) 환경조항 신설에 이어 2003년 5월 합의된 ‘SOFA 환경정보 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 A’(부속서 A)에 따라 캠프 페이지를 비롯해 반환 기지 36곳에 대해 환경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이 조사 때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다른 기지는 토양과 지하수 오염만 조사했는데, 캠프 페이지에는 방사능 오염 조사가 포함되었다. 춘천시 관계자는 “캠프 페이지 안에 핵배낭 등 핵무기 보관고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방사능 오염 측정을 포함시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이 조사 결과는 공개되지 못했다. 부속서 A의 ‘언론 또는 대중에 대한 정보 배포는 SOFA 환경분과위원회 한·미 위원장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독소 조항 때문이었다. 미군이 승인을 하지 않으면 정보공개 자체가 차단된다.

다만, 2007년 우회적으로 당시 환경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반환 기지 환경문제를 다룬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캠프 페이지를 포함한 29개 기지에 대한 환경오염 조사 결과가 알려졌다. 이 공개로 시민단체에 접수되지도 않았던 미군 기지의 환경오염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반환 기지 29곳 가운데 무려 26곳(토양 10곳, 토양+지하수 16곳)의 오염이 확인되었다.

캠프 페이지 방사능 조사 결과도 이때 공개되었다. 방사능 표면 오염도 허용치 기준이 4Bq(베크럴)/㎠ 이하인데, 측정치는 0.18~ 0.89Bq/㎠로 낮게 나왔다. 조사보고서는 ‘지표면, 대기 침토양 중 방사능 오염 조사에서 방사능 오염이 발견되지 않음’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상준 춘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2005년 방사능 조사가 정밀하지 못했다. 소문에 근거한 채 부실하게 이뤄져 특별한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핵무기 방사능 공포는 이후 가신 듯했지만 지난 3월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시민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3월28일 전국 12개 측정소에서 방사선 양을 조사할 때 춘천에서만 유독 세슘이 잇달아 검출되었다. 춘천 측정소에서만 세슘137이 ㎥당 0.018mBq(밀리베크럴), 세슘134가 0.015mBq 검출된 것이다. 세슘이 검출되면서 시민들이 캠프 페이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다. 


ⓒ시사IN 조남진5월23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고엽제 매립을 규탄했다.


춘천에서 세슘 검출된 까닭

2007년 청문회 당시 공개된 조사에 따르면 캠프 페이지 토양·수질 오염도는 공개된 29개 기지 가운데 가장 심각했다. 독성물질인 유류(석유계총탄화수소·TPH) 오염을 따져봤더니 기준치보다 100배나 높았다. 지하수는 벤젠 등 발암물질로 인해 오염됐다. 하지만 2005년 환경오염 조사 때 스넬 씨가 증언한 고엽제 관련 다이옥신 조사는 빠진 채 진행되었다. 칠곡 고엽제 파문을 계기로 경기도와 춘천시는 5월25일 국방부에 캠프 페이지 등 반환 기지의 다이옥신 오염 여부를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2005년 공개된 기밀문서 〈한국무기지원단-한국 핵작전 표준절차〉 표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따져봐야겠지만 춘천시민들의 사망 원인 통계도 눈에 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5~2009년 인구 10만명당 사망률로 따져봤을 때 춘천시의 암 사망률은 2005년 138.6명, 2006년 147.5명, 2007년 149.3명, 2008년 145.4명, 2009년 163.2명이었다. 전국 평균 10만명당 암 사망률인 2005년 133.8명, 2006년 134.0명, 2007년 137.5명, 2008년 139.5명, 2009년 140.5보다 매년 높았다. 춘천시의 암 사망자 수가 해마다 전국 평균치보다 10만명당 4.6~22.7명 높게 나온 셈이다. 공유정옥 산업안전보건의는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높게 나왔다는 건 경향성이 있다는 의미인데, 미군 기지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더 검토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칠곡, 부평에 이어 춘천 캠프 페이지까지 잇달아 고엽제 매립 증언이 나오면서 시민단체는 미군 기지 전수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은 “반환 기지뿐 아니라 주한 미군 전체 기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SOFA 환경 조항도 개정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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