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남장과 여장은 다양한 성 정체성과 이념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당당히 제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잘만 하면 남성성·여성성·중성성을 아우르며 ‘재미도 있고, 할 말도 하는’ 드라마가 나올 만도 하다.
“혹시 〈커피프린스 1호점〉 보냐?” “오오, 커피프린스! 당근 보지!” 다들 미친 연놈이었다. 나를 포함해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 방영되는 날이면 술자리도 마다하고 냉큼 집으로 내뺐다. 카페에서 일하는 ‘훈남 3인방’에 걸어 다니는 패션 화보 공유도 대단한 인기였지만, 역시나 이 드라마의 최대 이슈는 남자 대 남자, 공유 대 윤은혜, 곧 남자 대 남장 여자의 동성 사랑이 어떻게 흘러갈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내 김이 새버렸다. 한결(공유)이 남장 여자 은찬(윤은혜)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가치관을 송두리째 폐기 처분했던 순간 굵은 선 하나를 와장창 넘었던 드라마는, 은찬이 “저 사실 여자거든요”라고 밝히면서 다시 그 선을 후다닥 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더 이상 동성애에 관한 어떠한 궁금증도 일으키지 않았다.

은찬은 왜 남자가 되었을까?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고자 남자만 뽑는다는 카페에 취직하기 위해? 그것이 타고난 성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대단한 이유였을까? 아니다. 은찬은 처음부터 남자로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남자가 된 유일한 이유는, 다시 여자로 사랑받기 위한 고도의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확 좀 저질렀으면 어땠을까. 남장을 했으면 정말 남자가 되지…. 어쨌든 은찬 이후 〈쾌도 홍길동〉의 성유리도 남장 여자 캐릭터고, 〈개그 콘서트〉 ‘달려라 울 언니’의 여장 남자 개그맨들이 큰 인기를 누리는 등 바야흐로 ‘성 바꾸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급기야 문근영이 곧 시작할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 여자로 설정된 화가 신윤복을 연기하기로 하면서 바야흐로 ‘국민 여동생’이 ‘국민 남장 여자’로 탈바꿈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이젠 기대해본다. 무릇 ‘남장(男裝)’ 혹은 ‘여장(女裝)’이란 무시하지 못할 단어다. ‘이장취미(異裝趣味)’를 가리키는 말 ‘에오니즘(Eonism)’의 주인공 에옹 드 보몽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장으로 40년 인생을 살다 간 대표 인물이었으며, 프랑스 국왕 앙리 3세 역시 일상에서 여장을 즐긴 성도착자였다. 남장과 여장은 비록 그것이 종교·제의의 표현 관례를 넘어 위태로운 정신이상의 지경에 이른다 해도 다양한 성 정체성과 이념이 공존하는 우리 시대에 당당히 제자리를 차지할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국민 여동생’이 ‘국민 남장 여자’로 탈바꿈하는 세상

난 나
방송에서 이런 거 대놓고 하자고 한다면 얼빠진 놈이 될 것이다. 하지만 〈548일 남장 체험〉을 출간한 여성 저널리스트 노라 빈센트는 제목 그대로 548일 동안 남장 체험을 하며 어려서부터 지녔던 남성과 여성 간 편견의 벽을 깨뜨렸고, 뮤지컬 〈올슉업〉에서 남장 여자 캐릭터를 맡은 이소은은 남장 여자 연기가 훨씬 편하고 좋다며 “여성 캐릭터는 늘 예쁘고 참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한계 속에 있지만 남장 여자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래, 이 정도라면 문근영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든 〈바람의 화원〉이든 꼭 남장 여자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나가느냐가 드라마의 관건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성성·여성성·중성성을 모조리 아우르며 잘하면 ‘재미도 있고, 할 말도 하는’ 방송이 될 수 있을진대 이제는 남자가 되고픈 여자, 여자가 되고픈 남자가 브라운관에서 설렁설렁 걸어 다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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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이지훈 (FILM2.0 편집위원·영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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