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던 지난 5월22일 오후 5시40분, 머리가 허연 80세 할머니가 연단에 나섰다. 버지니아 AIPAC(에이팩: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을 대표하는 중앙위원 후랜신 콜이었다. 그녀는 “오래전 나는 리치먼드 시 슬럼가의 뒷골목에서 유난히도 눈빛이 빛나 영리해 보이는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아들이었고 그때 열여섯 살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지금 꼭 30년이 흘렀습니다. 그 소년은 AIPAC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여러분, 미국 하원의원인 에릭 캔터 공화당 원내대표를 소개합니다.”

청중 1만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호응하며 연단에 등장한 에릭 캔터는 “AIPAC 활동가로 내 인생의 좌표를 찾았다. AIPAC은 내게 유대인으로서 삶의 의미를 알게 했다”라고 화답했다. ‘연방의회 최고의 실세’로 통하는 캔터는 나아가 “AIPAC이 강력한 의회 지도자를 만들었고, 이로써 미국을 강하게 만들고 있다”라고도 했다. 


ⓒAP Photo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운데)가 5월23일 AIPAC 연례총회 만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AIPAC 2011 연례총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1947년 설립된 AIPAC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풀뿌리 시민 로비 단체로 통한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신의 조직’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하루라도 빨리 전쟁에 개입했으면 유대인 수만명의 목숨을 홀로코스트로부터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자각이 단체를 설립한 배경이 되었다.

AIPAC은 1968년부터 매년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서 연례총회를 개최해왔다. 5월22일 개막한 2011년 총회는 43번째로 열리는 AIPAC 총회였다. 15년째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AIPAC 실무 책임을 맡아온 하워드 코어 사무총장은 “43회 연례총회를 맞게 된 올해, 처음으로 참가자가 1만명이 넘었다”라고 말했다.

AIPAC이 이스라엘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필자가 AIPAC 행사에 참가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간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필자는 1999년 AIPAC 회원으로 가입했다. 유대인 사회의 풀뿌리 전략을 배워 한인 사회에 접목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이다. AIPAC 지도부는 “미국 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 속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AIPAC이 고수해온 철칙이기도 하다. 미국 시민이 다른 나라 정부를 위해 일하려면 반드시 로비스트(에이전트)로 등록해야 한다. 그러나 AIPAC은 이스라엘 정부의 로비스트가 아니다. 미국 국적을 지닌 시민으로 구성된 시민 로비 단체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를 위해 일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그럼에도 AIPAC 활동가들은 종종 FBI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는다).

3박4일 총회 기간에 기부금 3000억원 거둬들여

5월22~25일 열린 2011 AIPAC 연례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AIPAC 총회의 초청으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했고, 총회 시작 하루 전날 네타냐후를 만난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을 종용하면서 “1967년 전쟁 때의 국경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폭탄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56~58쪽 기사 참조). 회담 직후 AIPAC 총회장에는 네타냐후 총리가 충격으로 워싱턴 호텔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진통제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주류 미디어들은 AIPAC에 밉보인 오바마가 내년 선거를 망칠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AIPAC 지도부는 비상이 걸렸다. 본래 오바마는 AIPAC 개막식 연설을, 네타냐후 총리는 5월23일 만찬 연설을 맡게 되어 있었다. AIPAC 지도부는 개막식 전날인 5월21일 오후 대통령과 총리를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하워드 코어 사무총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여기는 미국이고 우리의 대통령은 오바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 결정 사항에 이견이 있다면 오히려 네타냐후 총리가 이해하고 양보해야 할 것’이라며 총리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에 진력하겠다고 했다.

하워드 코어가 노력한 결실은 대통령 연설로 나타났다. 5월22일 개막행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스라엘 안보를 위한 미국의 의무는 깨뜨릴 수 없는 원칙(ironclad)이다. 어제의 제안은 1967년 6월4일 존재했던 것과는 다른 국경을 설정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1967년 이전 국경선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 연설이 끝난 2시간 뒤에는 AIPAC 회원들의 페이스북, 트위터, 이메일 등으로 네타냐후 총리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필자에게도 “평화 협상의 방안을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구상하기로 결심했다”라는 이메일 메시지가 도착했다.

총회가 열리는 3박4일 동안 AIPAC은 2억7000만 달러(약 3000억원)에 달하는 기부금을 거뒀다. AIPAC을 자기의 재산 상속자로 정하는 ‘유언장 만들기’ 캠페인도 펼쳤다. 100만 달러 이상 기부자는 부부나 가족 사진을 대형 배너로 만들어 행사장 입구에 길게 세워놓았다. AIPAC에 따르면 이번에 5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회원은 6명, 2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회원은 4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같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AIPAC은 미국 의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를 입증하듯 이번 연례총회에도 상·하원 의원이 대거 출동했다. 5월23일 만찬에 참석한 상원은 60명, 하원은 360명 남짓이었다. 이번 총회에서 AIPAC은 이들을 상대로 두 가지 로비를 집중적으로 벌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국방비 지원과 이란 제재가 그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도 언급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권력이 하마스와 단절하지 않으면 어떠한 협상도 없다는 것이 AIPAC의 주장이다. 이 단체는 관련 법안을 하원에 상정해달라며 에릭 캔터 원내대표와 스탠리 호이어 민주당 원내총무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연례총회 마지막 날인 5월24일에는 지역별로 조를 나누어 의사당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인구보다 미국 내 유대계 인구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AIPAC은 “미국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 유대인의 안녕을 보장해야 한다”라고 회원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이번 연례총회에서도 AIPAC 활동가들이 강사로 나와 1년 동안 AIPAC이 집중할 이슈를 교육하고, 미국 의회를 상대로 로비하는 방식 등을 전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이 활동가일 뿐, 워싱턴 내 유력한 싱크탱크의 수석 연구원, 전직 연방의원 및 보좌관, 전·현직 교수, 저널리스트, 유명 앵커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AIPAC의 주장이 미국 외교정책의 풍향계 구실을 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만큼, 이 단체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임과 지지는 절대적이다. 외교부 장관과 주미 대사를 임명할 때면 이스라엘 총리가 AIPAC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매년 열리는 AIPAC 연례 총회에는 이스라엘 총리가 내각을 이끌고 참가한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과 유대인은 닮은 점이 많다. 근면 성실로 계급 상승을 이루고, 자녀 교육에 열정적이다. 모국이 늘 불안한 분쟁 지역이라는 점도 닮았다. 그런데 유대인 사회에 뿌리내린 공동체 의식과 기부 문화를 한인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한인들의 의식도 문제지만, 본국의 재외동포 정책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10년 넘게 AIPAC에서 배우면서도 늘 품게 되는 의문이다.

기자명 김동석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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