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외교적으로 여러 차례 평지풍파를 겪는 듯하여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나마 박근혜 전 대표를 중국 특사로 보낸 것은 참으로 잘된 일 같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중국이 호감을 가진 인물을 적시에 보낸 게 아닌가 싶다.
부친이 미국과 불편한 관계였던 박근혜와 다나카 마키코
박근혜 전 대표가 2006년 11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 측은 당시 박 전 대표에게 ‘21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아버지가 20세기 동북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것처럼 당신도 21세기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씨 측도 당시 국빈 대접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 중국 방문기는 미국 방문기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미국 역시 박 전 대표를 환대했으나, 정작 본인은 중국에서만큼 기꺼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의 손님 접대 방식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는 ‘생래적으로 친미가 어렵지 않겠나’라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는 순간 오버랩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다나카 마키코 전 일본 외상이다. 박근혜와 마키코는 그 선대의 ‘히스토리’에서 매우 흡사한 부분이 있다. 최근 외교부 비밀 해제 문서에서도 다시 한번 분명해졌지만, 박 전 대표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까지도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정도로 우파 민족주의의 길을 걸은 면이 있다. 생시에 그는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필자는 그 시대 산업화 주역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접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생래적으로 친미가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그렇다고 반미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미국의 견제와 간섭·통제를 뚫고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흘렸던 그들의 땀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할 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배경에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얘기 역시 그 때문에 나왔다. 다나카 마키코의 부친 다나카 총리가 몰락한 과정은 이보다도 훨씬 직접적이다. 1972년 7월 총리 취임 이래 2년4개월간 그는 중국과 국교 정상화, 에너지 민족주의적 정책 등 일본판 우파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이것이 화근이었던지, 퇴임 후 2년 뒤 벌어진 록히드 스캔들에서 그는 워싱턴발 괴문서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미국과 거리를 두다 권좌에서 밀려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 마키코의 가슴에 응어리가 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외상 시절의 그는 ‘반미 친중’ 성향으로 유명했다. 일본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실질적인 일본 총독’이라 불렸던 아미티지 당시 미국 국무부 부장관의 면담 요청을 ‘격이 안 맞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얘기는, 이웃 나라의 일이지만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고이즈미 정권은 자타가 공인하는 친미 일변도 정권이었다. 그런 정권이 친중 성향의 마키코를 외상에 앉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일본은 늘 태평양 건너 미국을 바라보면서도, 그 미국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머리 위로 중국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국이 그런 조짐을 보일 때마다,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손을 잡아버림으로써 미국을 ‘응징’해온 게 바로 일본 외교의 진면목이다.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바라볼 때 누군가는 반대 방향을 주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외교의 기본이다. 이명박 정부 시대에 모든 사람이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를 얘기할 때, 중국 쪽으로 열린 창이 하나쯤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