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불황’이라는 말은 해마다 반복된다. 상투적 뉴스에 가깝다. 그 중에서도 ‘출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술 출판은 역설적으로 위기라는 말이 더 자주 들려온다. 해마다 꾸준히 인문·학술 서적 20여 종 안팎을 출판하는 4개 출판사 대표와 기획자가 모였다.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펴낸 바 있는 개마고원은 그동안 고종석·손석춘·강준만 등 비판적 지식인의 책을 펴냈다. 그린비는 연구 공동체 ‘수유+너머’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인문·철학 서적을 주로 출간한다. 도서출판 길은 묵직한 학술서적을 주로 펴내왔고, 이매진은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의 책과 젊은 연구자들의 ‘젊은 인문서’를 출간하고 있다. 각 출판사의 올해 출간 방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출판사별로 올해 출간 방향이나 계획이 어떻습니까?


ⓒ시사IN 한향란유재건 (그린비 대표)  “출판이 만약 어렵다면, 돌파할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문·사회과학 출판도 오디오북이나, e-러닝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콘텐츠 자체의 쇄신도 필요하지만 미디어적 관점에서 고민을 병행해야 한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 : 인문 출판이 힘을 발휘하려면 종수가 늘어야 한다. 인문서의 판매 부수가 2000~3000부 수준이라고 볼 때, 매출을 높이려면 종수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린비는 올해 34종을 출간하고, 향후 2~3년 안에 한 해 50종 정도 내는 출판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마다 한 권씩 책을 펴내 단행본의 깊이를 갖되 현실 문제에 답하는 순발력을 발휘하고 싶다. 올해 출간의 주요 방향은 ‘근대’이다. 근대는 어떻게 생겨났고, 근대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근대의 원점부터 비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현안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은 인문 출판이 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대신 저변에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 우리 출판사가 생긴 지 5년 정도 되었다. 지난해 19종을 냈고, 올해 40~50종 정도 출간할 계획이다. 현재 기획된 책이 200종쯤 되는데, 올해부터 본격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색깔을 확실히 드러낼 책들을 내고 싶다. 중역을 하지 않고, 전공자에 의한, 주해가 충실한 엄밀한 결정판본을 내자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독일어 원전 번역본이나 동서양 고전을 집중해서 번역 출판할 계획이다.

장의덕 (개마고원 대표) : 두 출판사는 모색기를 거쳐 자기 색깔을 확실히 잡은 것 같다. 개마고원은 〈인물과 사상〉 이후 몇 년 동안 방향을 잃었다. 그동안 국내 기획서 중심으로, 학술서보다는 사회과학적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쉽지 않았다. 독자 대상에 관한 고민이 크다.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이제 대학생은 독자층에서 사라진 것 아닌가’ 걱정한다. 대학생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가 있다. ‘인문적 소양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사회가 강요하는 형국이다. 개마고원의 주 독자층은 386세대(30대 후반, 40대 초반)이다. 그런데 눈높이를 386으로만 잡아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제는 ‘10대 좌파’를 발굴하는 기획을 중심에 두고 있다(좌파가 별건가?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말하는 거다). 10대들이 사회에 대해 진취적이고, 진보적 의식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준비 중이다. 20종 내외를 펴낼 계획이다.

정철수 (이매진 대표) : 2004년부터 시작한 젊은 출판사로 그동안 60종을 냈다. 작은 출판사가 생존을 해야 하니까, 종수는 20~25종으로 늘릴 것이다. 학술출판 종수를 늘리거나 동서양 고전에 천착하는 방식은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런 책을 내는 출판사가 있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틈새를 찾아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게 목표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젊은 연구자들을 신진 필자로 키우는 전략을 택했다. 석사 학위자를 포함해 필자를 발굴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유재건 : 4개 출판사가 차이가 많다. 경쟁하지 않아서 좋다(일동 웃음).

- 각 출판사가 종수를 늘리려는 경향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출판이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유재건 : 인문·사회과학 출판이 힘들다고 하는데…아니다, 저는 어렵지 않다. 다만 위기론 같은 담론이 유포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일동 웃음). 판매 부수 때문인지, 종수가 적어서 어려운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린비에서는 인문학 서적이 1000부 정도 팔려도 출판사 운영이 되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 출판이 만약 어렵다면, 돌파할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문·사회과학 출판도 오디오북이나, e-러닝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콘텐츠 자체의 쇄신도 필요하지만 전달 방식 등 미디어적 관점에서 고민을 병행해야 한다. 미디어적 실험이 함께 가야, 인문학 출판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다.
그린비에서는 연구자를 모시고 내부 강의를 많이 한다. 그거를 전부 녹음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4~5년 후에 ‘원 소스 멀티 유스’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사IN 한향란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인문서는 그 책의 주제를 전공한 전공자가 번역하는 출판 문화가 필요하다. 비전공자가 번역을 하는 경우, 번역이 엄밀하지 못하고 황당한 오역이 생긴다. 출판 편집자나 기획자가 번역자를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승우 : 13년째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데, 우리 출판사는 완전히 복고주의다(일동 웃음). 한국 출판이 100년이 되었는데도, 정통·정도·중심을 잡아주는 출판사가 없다. 별처럼 빛나는 출판사들이 경영 세습 등 변화를 겪으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우리 출판사는 책 출간 여부를 결정할 때 몇 부 팔릴까 생각 안 한다. 품질이 보장된다면 출간한다. 400~500부만 팔려도 낸다. 책만 잘 만들면, 진정한 독자는 본다.

장의덕 : 두 사람과 조금 의견이 다르다. ‘좋은 책을 내면 독자는 본다’는 말은 말문을 막아버리게 만든다. 책이 안 나갔을 경우에 할 말이 없게 되는 거다. 개마고원처럼 인문 대중서를 펴는 출판사로서는 부수에 대한 고민 없이 책을 출간할 수 없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인문·사회과학 책 가운데 재판을 찍는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심각한 수준이다. 게다가 초판 부수도 적다. 이전에 3000부 초판을 찍다가 지금은 1500~2000부 발간한다.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기획력의 부족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답답함이 있다. 책 읽는 풍토의 문제인지, 교육제도의 문제까지 거론해야 할지… 해답이 잘 안 보여 답답하다.

정철수 : 이매진의 주 독자층도 개마고원과 비슷하다. 인문 출판의 위기가 매출의 감소도 있지만 책 만드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다. 젊은 층이 독자층에서 사라지고, 더불어 편집자도 그 세대에서 배출되지 않고 있다. 현재 외국에서 나오는 최신 이론을 소화할 만한 젊은 편집자가 없다. 그렇게 되면 교정이나 교열도 불가능하다. 30대 중반인 우리 세대가 50대까지 현역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출판 동료들과 말을 나눈 적이 있다(웃음). 이렇게 되면 ‘1인 출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스러울 지경이다.

유재건 :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출판은 새로움과 독창성으로 발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자본론〉을 독일어 원전 번역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에 그런 새로움이 필요한 시기다.
독자를 키워내야 한다. 인문 출판이 살아남으려면 판을 키워야 한다. 고용을 창출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인문 출판을 하겠다고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경영을 합리화하고, 규모를 일정 정도 늘려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는 초판 2000부만 팔리는 것을 전제로 사업 모델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일관성을 가지고 시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다. 보이지도 않는 시장성을 생각하면 답이 없다. 우리 출판계의 실력이라면 독자 2000명은 포착할 수 있다. 충성 독자를 500명, 확산 독자를 3000명 잡고서 사업모델을 잡는 것을 고민한다.

- 2007년 인문·사회과학 출판에서 주목할 만한 화두나 출판사가 있었다면?

ⓒ시사IN 한향란장의덕 (개마고원 대표)  “인문·사회과학 책 가운데 재판을 찍는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심각한 수준이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실패하는 것이 기획력의 부족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답답함이 있다.”
장의덕 : 지난해 한국의 사회과학 출판사 체면은 후마니타스가 다 세웠다고 본다. 후마니타스가 없었다면, 한국 사회과학 출판은 정말 ‘쪽팔렸겠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같은 책은 현실 밀착적이다. 이런 책이 나온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또 〈88만원 세대〉는 중학생,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쓰였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내용의 함의가 깊다.

유재건 : 강명관 교수가 쓴 〈조선의 책벌레들〉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 생산과 수용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지난해 학술서 4권을 냈는데, 그 책을 다 읽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좋은 책은 찾아 읽게 하고, 독자가 지식의 세계에 한껏 욕심을 내게 만드는 책이다. 〈88만원 세대〉에 대한 평가에 동의한다.

이승우 : 강명관 교수의 다른 연구들이 인상적이었다. 실학 담론에 대한 본격 문제 제기였는데, 학계에서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김동춘 교수가 쓴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은 ‘기업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 그로부터 10개월 만에 삼성 문제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기업사회화하는 것을 예리하게 짚었다.
정철수 : 꼽는 책들이 겹친다. 저도 〈88만원세대〉이다.

- 꼽는 책들이 주로 국내 필자가 쓴 것이다. 그런데 2008년 출간 예정작 리스트를 보면 국내 필자가 쓴 책의 비중이 크지 않다. 개마고원이 참석한 다른 출판사에 비해 국내서 비중이 높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의덕 : 국내 기획서는 초안을 잡아서 청탁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품이 많이 든다. 지난해 낸 책 가운데 한 권은 기획하고, 필자 찾고, 청탁하고, 출간까지 5년이 걸렸다. 청탁하고 나서 원고 펑크나고, 또다시 청탁하고. 필자가 서너 번 바뀌었다. 그런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교수들은 자기 논문을 묶어내면 폼도 나고 실적도 쌓인다. 전공서는 낸다. 그런데 인문 대중서는 기피한다. 쓰는 데 품이 많이 들어서다. 전공서를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게 힘들게 써도 기껏 2000~3000부 나가는 상황이다. 그러니 책을 쓰려고 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필자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지난해 국내 필자가 집필하는 시리즈 12권을 내기로 했는데, 딱 한 권 나왔다. 필자가 없어서다.

ⓒ시사IN 한향란정철수 (이매진 대표)  “인문 출판의 위기가 매출의 감소도 있지만 책 만드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다. 젊은 층이 독자층에서 사라지고, 더불어 편집자도 그 세대에서 배출되지 않고 있다. 최신 이론을 소화할 만한 젊은 편집자가 없다.”
정철수 : 올해 젊은 연구자들을 필자로 발굴하려는 것을 주요 방향으로 잡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교수나 박사 이상 필자를 고집할 게 아니라 다양하게 찾아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시민사회의 활동가들. 이게 잘되면, 국내 인문·사회과학 출판이 살 수 있는 활로가 되지 않을까.

장의덕 : 현장 활동가들, 워낙 바빠서… 출판사로서는 아주 괴롭다(일동 웃음).

유재건 : 국내서 비중이 낮은 것이 걱정할 문제일까 싶다.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책이면 굳이 국내서인지 번역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외국은 작가 인프라가 두터운 것이 사실이다. 한 사회가 갖는 힘이다.

- 올 한 해 인문·사회과학 출판계가 해결했으면 하는 과제가 있다면?

이승우 : 인문서는 그 책의 주제를 전공한 전공자가 번역하는 출판 문화가 필요하다. 이전에 비해 우리 사회에 인재 풀이 생겼다. 비전공자가 번역을 하는 경우, 번역이 엄밀하지 못하고 황당한 오역이 생긴다. 출판 편집자나 기획자가 번역자를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장의덕 : 인력 구조 문제가 염려스럽다. 메이저 출판사가 인력을 키워서, 그들이 작은 출판사로 유입되어 활력이 되면 좋은데. 지금은 오히려 작은 출판사가 사람을 키우면 메이저 출판사들이 쏙쏙 빼간다. 임프린트 제도가 시행되면서 인력을 빨아들이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어 걱정스럽다.

유재건 : 시장에 휘둘리면 방향이 흔들리고, 그러면 독자가 떨어져나간다. 자기 방향을 명확히 설정해 흔들리지 않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기획 예고제를 했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새 책을 기다리고, 출판사들도 서로 참조할 수도 있다. 큰 틀에서 독자와 저자를 더불어 키우지 않고, 자기만 살려고 하면 결국 그게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다.

진행·정리/노순동·차형석 기자

기자명 노순동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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