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향기〉(1997년) 이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란)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사랑을 카피하다〉가 낯설 수 있다. 단지 로케이션 장소가 이탈리아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탓만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삶의 잠언들을 길어올리던 키아로스타미의 소박한 리얼리즘은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고, 중년의 부부를 연기하는 것 같던 역할극은 어느 순간 현실이 되어버린다. 과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오리지널만이 아니라 복제품도,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을 카피하다〉는 그런 물음 자체를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묘한 영화다.

영국 작가 제임스 밀러는 복제품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편 〈기막힌 복제품〉이라는 책을 썼다. 이탈리아판 출간을 기념해 투스카니에 온 밀러는 자신의 팬이라는 프랑스 여성을 만나게 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골동품 가게를 하는 그녀가 관광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된다. 작가와 팬으로서 자리를 지키던 그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틀어진다. 레스토랑의 여주인이 그들을 부부로 오해하여 말을 건 후, 부부인 양 역할극을 하다보니 정말 부부가 되어버린 것 같다. 부부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과거의 추억들에 대해 서로 털어놓고, 힐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들은 역할극을 하는 것일까? 

 

 


관객이 관계를 설정하고, 결말도 짓는다

여주인의 오해 혹은 오독(誤讀)은,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놓았다.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로 말한다면, 감상자의 해석과 믿음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바뀌는 것, 혹은 결정되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보는 이의 감정이나 믿음에 따라 등장인물의 설정까지도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리얼리즘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사랑을 카피하다〉는 보는 그대로를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체리 향기〉 이후 관객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지는 예술품에 대한, 개념적인 영화 작업을 주로 해왔다. 작품 자체에 내재하는 본질 혹은 아우라에 의해 감상자가 일정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반응에 따라 작품 자체의 의미가 변형 혹은 창조된다는 것.

원제인 ‘Certified Copy’는 인증받은 복제품, 복사라는 의미다. 국내 제목인 ‘사랑을 카피하다’는 의미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지만, 영화의 내용을 적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이 진짜 작가와 팬이라면, 그들은 누군가의 사랑을 카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볼 수도 있다. 15년을 함께 산 부부의 사랑만이 가치 있는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카피하여, 지금 당신에게 내비치고 헌신한다면 그것 역시 가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가상현실이 현실 못지않게 중요하고 의미심장해진 21세기의 지금은 더더욱. 〈사랑을 카피하다〉는 실험적인 영화들에 비해 훨씬 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지만, 모호한 의미는 여전하다. 이것이 현실인지 가짜인지조차 관객은 확정할 수 없다. 결말도 열려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창조하고, 결정짓는 것은 결국 관객이다.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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