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속이다.’ 서울미술대전 2011년 연례전(1985년부터 매해 개최)이 뽑아든 타이틀은 눈속임 회화(trompe l’oeil: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목적을 가진 그림)와는 본질이 다르지만 솔깃한 매력은 담았다. 사진의 정밀도에 도전했고, 결국 사진의 진실성마저 극복한 극사실주의 회화를 모은 전시회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은 시민들은 ‘너무 잘 그렸다’라며 심금 울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갈피조차 못 잡을 동시대 미술의 주류가 무엇이건 간에 불특정 대중이 합의하는 ‘잘 그린 그림’의 절대 기준은 우월한 재현 능력이다.

사진처럼 세밀해서 포토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극사실주의(hyper-realism)는 1960년대 후반 미국 화단에서 태동한 미술 사조이다. 서양 현대미술사를 채운 숱한 미술 운동이 발생 당시에만 미학적 성과를 남긴 채 이내 유의미한 계보를 잇지 못하고 사라진 것과 달리, 극사실주의와 팝아트는 근 반세기를 넘어서도 시장의 지속적인 수요와 평단의 주목을 함께 받으며 롱런하는 현대적 미술이다. 두 미술 사조는 한때 전 세계 화단 권력을 점령한 추상미술의 장기 집권에 반발한 구상미술인 점과, 대중 소비문화를 진지한 탐구 대상으로 간주한 점에서 공통된다.  


김창영 작

연초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는 할리우드 남녀 스타 각 다섯 명의 대형 초상화 총 10점을 내건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다. 극사실주의 화가 리처드 필립스의 개인전으로, 타이틀은 ‘모스트 원티드(Most Wanted)’라고 걸었다. 대중 수요가 높은 연예인이 진중한 재현 대상이라고 전시 제목이 대놓고 선포한 꼴이다. 리처드 필립스는 화단은 물론이고 대중문화계와 꾸준한 협업을 유지했다(미국 시즌 드라마 〈가십 걸〉의 실내 무대에 장식용 그림을 제공하는 식). 그것은 순수미술이 제도 화단에 예속되지 않고도 존립 가능하다는 대안적 제스처였고, 그 적절한 대안은 찬탄할 만한 정밀 기교와 대중 취향을 결합한 극사실주의였다.

셀러브리티(celebrity:유명 인사)의 초대형 초상화를 내건 리처드 필립스의 전략에서 보듯, 동서 양 진영 극사실주의 회화의 단골 탐닉 대상은 소비사회의 소모품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명 인사의 얼굴, 남성 관음 욕망의 표적인 여성 란제리, 투명한 유리잔과 사탕 따위가 확대되어 그려졌는데 관람자의 소유 욕망까지 부풀리는 효과를 낳았다. 무릇 정물화의 전통을 따르는 듯하나, 속물적 근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우선한다. 정확성을 고수한 채 부푼 대상은 일개 오브제를 성역화하는 상징적 효과를 낳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화가의 손에 경외를 품게 만든다. 괜히 진지한 철학을 담은 양 폼 잡지 않는 태도 역시 동시대적이다. 정물화의 황금기로 간주되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도 꽃과 유리잔을 단골 메뉴로 그렸고, 유한한 삶의 허망성이라는 교훈을 탑재했다고 해석되는데, 여전히 신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화가가 취할 수 있는 양해였던 것 같다. 반면 현대적 극사실회화가 철지난 관념적 가치를 떨어내고 정밀성에 올인하는 점은 진솔한 고백처럼 읽힌다. 


김대연 작

정물과 인물로 나눈 전시 공간 너무 안일

한편 1970년대 극사실주의 원조와 정보통신 시대에 화려하게 부활한 극사실주의는 사진 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즉 고해상도 사진으로 대상을 촬영한 후, 그것을 밑그림으로 정밀 묘사에 돌입하는 것이 극사실주의의 일반 제작 공정이다. 이런 연유로 철학자 프레드릭 제임슨은 실물을 본뜬 사진을 또다시 본떴다는 점에 극사실주의 회화를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 잡은 시뮬라크르(simulacre:원본의 가치를 뛰어넘어 독자성을 확보한 복제)의 사례로 지목한 바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걸린 초대형 극사실주의 회화들은 실물을 능가하는 매력을 뿜는다. 유광 바니시(작품을 마무리할 때 표면에 광택을 올리는 투명 액체)가 발린 그림 상당수의 반질반질한 표면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극사실주의는 등장 초기에 예술가의 영혼보다 기계적인 기교만 앞세웠다는 비난을 곧잘 받았다. 그렇지만 예술이 영혼을 투영한다는 빛바랜 환상이 더는 통용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고전적 매체인 회화가 확보할 수 있는 미학의 극단성은 빼어난 손재주인 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김은옥 작

〈2011 서울미술대전- 극사실회화〉를 소개한 글에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보다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기법 자체에 주목한다’며, 양해를 구하는 짧은 지문이 눈에 띄었다. 보편적 시민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심사 같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그래도 전시 공간을 두 섹션으로 구분한 후 하나는 정물을, 다른 하나는 인물과 풍경을 다룬 기획안은 안일해도 너무 안일하다. 한국 미술 관객 수준의 인프라는 높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급부상한 극사실주의 회화에 대해 최소한 기획자의 견해 표명 정도는 글에서건 공간 안배에서건 가시화했어야 한다. 이럴 바에는 섹션 구분 없이 숫제 통짜로 묶어 작품을 풀어놓았어도 괜찮을 법하지 않았나. 기획자란 언제나 기획 주제를 투명하게 바라볼 위치에 있지 않다. 하물며 주제의 한계까지 짚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강형구 작 〈자화상〉

국내 화단에 극사실주의가 떠오른 시기는 1980년대지만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그러던 차에 2000년대 중반 미술시장이 비등하면서 새로운 호흡을 부여받았다고 정황을 파악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어디에 걸리는 게 어울릴지 진솔하게 생각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유난히 반들거리는 표면의 초대형 유화란 시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주상복합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층이 거실에 걸어 손님을 맞기에 적절하다 판단할, 그런 종류의 화면일 터이다. 구입자의 그런 심사와는 별개로, 진실과 무관한 시뮬라크르에 종속된 세상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동시대성에 가장 근접한 시각예술은 극사실주의인 게 분명하리라.


안성하 작 〈담배〉
기자명 반이정 (미술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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