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섯 살 황상기씨는 택시 운전기사이다. 강원도 속초에서 30년째 운전대를 잡고 있다. 요즘 벌이는 손님이 많으면 하루 10만원선. 그마저도 공치는 날이 많다. 걸핏하면 운전대를 놓고 서울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가 운전대를 놓은 건 2007년 3월6일 딸을 잃고 나서다.    1남2녀 가운데 둘째 딸인 유미씨는 그가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숨졌다. ‘삼성 백혈병’을 치료하다가 오던 길이었다. 황씨는 백혈병이 뭔지, 딸이 뭘 하는지도 몰랐다. 가정 형편 때문에 황씨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딸을 잃은 애끊는 부정(父情)이 그를 깨쳤다. 삼성은 유미씨가 숨지기 직전 ‘백지 사표’를 받아갔다. 그는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고 발로 뛰었다. 언론사 문을 두드리고, 인권단체를, 민주노총을, 삼성을 찾아다녔다. 기자로 치면 탐사 보도를 한 것이다. 황씨의 지독한 ‘현장 취재’는 결국 빛을 발했다. 백혈병을 그저 운명이겠거니 여기며 숨졌거나 투병 중인 이들을 찾아낸 것이다. 이어 이종란 노무사가 발 벗고 나섰고, 공유정옥 산업의학전문의가 가세했다. 교수·변호사가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이 문제는 공론화되었다.

ⓒ시사IN 양한모

다시 말해 삼성 백혈병 문제는 이른바 반삼성 기치를 내건 시민단체가 트집을 잡고 생떼를 부려 시작한 게 아닌 것이다. 황상기라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이의 딸을 잃은 부정이 일궈낸 특종인 셈이다. 그는 지금 베이니, 디켐이니, 디퓨전이니 하는 반도체 관련 전문 용어를 줄줄 꿰고 있다.

이를 덮으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다. 지난 연말에도 삼성 직원이 찾아와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거액을 제안했다. 그러나 황씨가 바라는 건 돈이 아니다. 노동조합이다. 삼성에 노조만 있어도 또 다른 황유미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딸을 잃은 부정을 이건희 회장도 모를 리 없다. 2005년 이 회장 역시 막내딸을 잃었다. 이윤형씨는 스물여섯, 황씨의 딸 유미씨는 스물셋에 아버지의 가슴에 묻혔다.

황씨는 6월23일 또 서울로 올라온다. 유미씨의 벽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해달라고 낸 행정소송 1심 선고가 내려진다. 황씨는 정부와 사법부마저 외면하면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겠다고 했다. 이번 강원도 재·보선에서 한 표를 행사한 그는 내년 대선에도 주민등록증을 들고 투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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