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던 한 남자. 지진이 나자 급히 대피한다. 그런데 피난지가 그토록 반대하던 원자력발전소이다. 개구리도 사람도 뛰어가 대피한 원전만 빼고는 모든 땅이 지진으로 갈라졌다. 원전 반대 활동가로 보이던 그 남자, 이렇게 말한다. “휴! 겨우 살았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말한다. “진짜 튼튼한걸?” “원자력발전소 만세다! 만세!”

이 이야기의 만화를 보려면 고등학교 〈경제지리〉(교학사 펴냄) 교과서 71쪽을 펼치면 된다(31쪽 상자 자료 ①). ‘원전의 유용성과 문제점에 관한 견해를 정리해보자’라는 탐구 활동의 예시로 제시된 이 네 컷짜리 만화의 제목은 ‘어떤 시설보다 안전한 원자력발전소’이다.

ⓒ연합뉴스지난해 9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주최한 원자력 체험교실에서 원자력과 관련된 퀴즈를 풀어보고 있다.

초·중·고교 사회·과학 교과서의 ‘자원의 이용’ ‘에너지의 이해’ ‘사회 변화와 갈등’과 같은 대단원 속에 표현된 원자력 에너지는 안전하고, 깨끗하고, 경제적이다. 교과서들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은 환경오염이 가장 적고(고등학교 〈경제지리〉 교학사 펴냄, 64쪽),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도 있고(고등학교 〈지구과학〉 중앙교육진흥연구소 펴냄, 71쪽), 매우 경제적인 발전 방식(고등학교 〈한국지리〉 두산동아 펴냄, 104쪽)이기도 하다.

이같이 원자력에 우호적인 교과서 내용들은 결코 저절로 게재된 것이 아니다. 원자력 홍보를 맡은 지식경제부 산하 단체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1996년부터 ‘각급 학교 원자력 관련 수정 반영을 위한 교과과정 개편 추진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교과서에 표현된 원자력 관련 내용 수정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해왔다. “대안적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학생들의 ‘막연한’ 부정적 태도를 변화시킨다”라는 목표가 뒤따랐다.

2007년부터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교과서 자료 개발 연구 용역을 수행해온 박성혁 교수(서울대·사회교육과)는 “원자력에 관해 잘못 기술된 내용 오류를 정정하고, 좀 더 나은 에너지 관련 수업 구성을 제안하는 방향으로 자료를 만들어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교과부에 보내는 교과서 수정 요청 자료를 보면 단순한 ‘오류 정정’ 차원을 넘어서는 내용이 많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반대 시위 사진 크기를 줄여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중학교 〈환경〉 금성출판사 펴냄, 149쪽), ‘고장의 자랑거리’ 사례로 지역 축제 대신 원전 전경 사진을 넣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초등학교 3-1 〈사회〉 교과부 펴냄, 75쪽).

2007~2009년에만 207건 수정

교과부와 한국검정교과서협회를 통해 각 교과서 출판사와 저자들에게 전달되는 이런 수정 요청이 모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교학사 교과서 편집부의 한 관계자는 “어느 단체에서 오는 것이든 수정 요청이 전달되면 저자들과 협의한 뒤 내용의 타당성이 있으면 수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특별한 사실 오류가 아닌 일반적인 내용에 대해 수정 요청을 많이 하는 곳은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독보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노력 덕인지,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자료에 따르면, 교과서 수정 요청 작업은 매년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2007~2009년 연도별로 교과부를 통해 각 교과서 출판사에 수정을 요청한 309·240·269건 가운데 각각 95·35·77건이 받아들여졌다. 성공률이 최고 30%에 이른다.

① 고등학교 〈경제지리〉(허우긍 외, 교학사) 71쪽‘원자력발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화를 통해 나타내보자’는 탐구 활동의 예시로 제시된 삽화. 원전을 반대하던 사람이 정작 지진이 일어나니 원전으로 대피할 만큼 원전이 안전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교과서 수정에서 특히 공을 많이 들이는 부분이 원자력의 안전성과 관련한 내용이다. 지학사에서 펴낸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 35쪽(31쪽 상자 자료 ②)을 보자. 과학자의 연구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읽기 자료의 애초 제목은 ‘원자력의 가공할 피해’였다. 하지만 2008년과 2009년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두 차례 수정 요청에 의해 제목은 ‘원자력의 잘못된 이용으로 인한 피해 사례’ ‘두 얼굴의 원자력’처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피해를 기술한 두 번째 문단도 CT·MRI와 같은 원자력을 이용한 의학기술의 발전 내용으로 대체되었다.

고등학교 〈한국지리〉(두산동아 펴냄) 교과서 107쪽의 보충 자료(31쪽 상자 자료 ③)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원자력발전소의 온배수로 인한 주변 환경 피해’라는 제목이 ‘자원 개발에 따른 지역의 변화(원자력발전소 부근)’로 바뀌고, 내용도 “원전 주변 어종이 감소하고 있다”에서 “원전 주변 진주조개 시범 양식이 성공을 거둬 지역 주민들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따위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강진이 발생하면 원전으로 피하라’고?

수정된 교과서에 따르면, 원전은 강한 지진이 일어나도 안전하다. 2007년 발행된 중학교 3학년 〈기술가정〉(두산동아 펴냄) 교과서 50쪽 ‘쉬어가기’에는 산업 안전사고의 한 사례로 경기도 부천시 LP가스 충전소 폭발 사고를 소개했지만,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수정을 요청한 뒤인 2008년판에는 ‘규모 6.5의 강진에도 멀쩡한 원자력발전소’라는 제목의 원전 내진 설계 홍보 글로 바뀌었다. 그나마 ‘강진이 나면 원자력발전소로 피하세요’라는 내용을 담은 〈동아 사이언스〉 기사를 교체 자료로 제안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최초 요청에 비하면 훨씬 객관적인 내용이다. 지각변동을 다룬 중학교 1학년 〈과학〉 교과서(지학사 펴냄) 19쪽의 읽기 자료도 2007년 ‘우리나라는 지진의 안전지대인가?’에서 2008년 ‘지진이 발생해도 끄떡없는 원자력발전소’로 제목이 바뀌고, 내진 설계를 강조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② 고등학교 〈사회·문화〉(이진석 외, 지학사) 35쪽 / 애초 교과서의 ‘원자력의 가공할 피해’라는 제목이 원자력문화재단의 요청에 따라 ‘원자력의 잘못된 이용으로 인한 피해 사례’ ‘두 얼굴의 원자력’ 순서로 바뀌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피해를 다룬 두 번째 문단도 원자력의 의학적 이용을 담은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교과서 내에서 원자력이 어느 신재생 에너지보다 더 우수한 ‘녹색 에너지’로 자리 잡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지학사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2009년판) 190쪽에는 ‘자원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수력·풍력·지열·태양열 등의 신재생 에너지를 소개해놓았으나, 2010년판을 보면 “이 같은 재생 에너지는 경제적 효율성이 낮은 한편, 원자력발전은 비용이 적어 자원 고갈 문제의 현실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라고 설명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수정안대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화학Ⅰ〉(교학사 펴냄) 교과서 88쪽에 제시된 대기오염 방지책 가운데 하나도 기존의 ‘풍력 이용’에서 ‘원자력 이용’(31쪽 상자 자료 ④)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교과서의 원자력 관련 내용이 이렇게 수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강 아무개 교사(사회과)는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요청해 이뤄지는 교과서 수정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 것이 아닌 한 특정 단체의 입장일 뿐일 텐데, 교과서를 접한 학생들이 균형 잡힌 교육의 기회를 잃는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전국사회교사 모임 장경주 회장은 “교과서뿐 아니라 교직연수 등 교사 교육에서도 한국원자력문화재단 등 돈 많은 단체로부터 한쪽의 의견만 전해 듣는 경우가 많은데(32쪽 상자 기사 참조), 환경과 생명에 대해 고민하는 교사라면 지금의 풍요를 위해 미래 세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스스로 학습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③ 고등학교 〈한국지리〉(이승호 외, 두산동아) 107쪽보충 자료의 제목 ‘원자력발전소의 온배수로 인한 주변 환경 피해’가 ‘자원 개발에 따른 지역의 변화’로 바뀌고 온배수의 장점을 다룬 내용이 추가됐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교과서 수정 요청 작업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자료 개발 용역을 맡은 박성혁 교수(서울대) 연구팀이 오는 7월 연구를 마무리하면,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그 자료를 기반으로 예년처럼 교과부에 원자력 관련 교과서 내용 수정을 요청할 것이다. 박상구 한국원자력문화재단 차세대교육실 팀장은 “일본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연구 작업이 시작됐기 때문에, 일본 사고와 관련된 새로운 방향이나 지침을 용역팀에 따로 요청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다만 연구팀의 공동연구원인 곽한영 교수(부산대·사회교육과)는 “원자력의 위험성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후쿠시마 사고를 외면하지 말고 교과서 수정 요청 작업을 하자는 이야기가 연구팀 내부에서 이뤄진 바 있다”라고 말했다.

④ 고등학교 〈화학Ⅰ〉(윤용 외, 교학사) 88쪽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활용되는 방법들로 ‘풍력의 이용’ 대신 ‘원자력의 이용’이 제시되고, 사진도 교체됐다.

⑤ 고등학교 〈경제지리〉(최운식 외, 지학사) 198쪽원자력문화재단의 요청으로, 세계 경제 속 우리나라 공업 기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 공업’에서 ‘원자력발전 수출’으로 바뀌었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