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KAIST) 학부 과정의 원래 이름은 KIT였다. Korea Institute of Technology의 약자다. 1989년 KIT가 카이스트에 흡수 통합된 뒤에도 한동안 도서관 등 캠퍼스 곳곳에는 KIT라는 이름이 남았다. KIT 정문(현재 카이스트 동문) 붉은색 벽 위에 새겨진 KIT라는 큰 글자는 1990년대 초반까지 카이스트 학부생의 상징 로고처럼 기억됐다.

KIT라는 이름에서 미국 명문 공과대학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KIT는 설립 초기에 여러 미국 공과대학을 모델로 삼았는데, 그중 MIT가 주요 모델이었다. ‘포항공대는 한국의 칼텍, KIT는 한국의 MIT’라는 말이 유행했다.
 

카이스트(아래) 학부 과정은 초창기 미국의 명문 공과대학 MIT(위)를 많이 모방했다. 학생에게 많은 과제를 주고 몰아붙이는 방식도 그중 하나였다.


이름뿐만 아니라 대학 운영도 MIT와 비슷했다. 종합대 방식이 아니라, MIT처럼 공대 하나만 집중해서 키우는 방식으로 명문대를 만들겠다는 건 당시로서는 모험이었다. 학생에게 많은 과제를 주고 몰아붙이는 방식도 MIT 스타일이었다. 아울러 ‘자살 최고 대학’으로 유명한 MIT의 악명도 함께 이어받았다.

1996년부터 카이스트 자살 학생 알려져

카이스트 학부 92학번 황효균씨는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한 명씩 자살자가 나온다는 느낌이었다. 당시에는 캠퍼스 안에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기숙사 방 하나에서만 연달아 자살자가 나왔으니 그 방은 피하라는 식의 괴담도 있었다”라며 회고했다. 그는 실제로 친구의 자살을 목격하기도 했다. “밤에 실험실 창 밖으로 뭔가가 떨어지는 것을 봤다. 다음 날 그것이 투신 자살 순간이었음을 알았다.” 이번처럼 대학원생이 캠퍼스 밖에서 자살하는 경우는 학우들도 알기 힘들었다.

자살 사건을 사고사로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3년 여름 기계공학동 옥상에서 한 학생이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사고 정황이나 학생의 심리 상태, 친구의 증언, 시신 발견 지점 등을 고려하면 자살이 명백해 보였지만, 학교 측은 “다리를 헛디뎌 실족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1980~1990년대 초반까지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찾기 힘들다. 당시 언론은 지방에 있던 이 대학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카이스트 학생 자살 사태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96년부터다. ‘역대 최연소 카이스트 입학생’이라는 타이틀로 꽤 유명했던 이현우씨가 1996년 3월 자살하면서 뉴스에 카이스트 자살 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 측이 나이 어린 학생을 위한 배려 없이 무작정 경쟁을 시킨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마치 올해 1월 ‘로봇 영재’ 조 아무개씨의 자살로 카이스트가 주목을 받은 것과 닮은꼴이었다.

학사경고 줄이자 자살자도 줄어

1996년 4월과 7월 연이어 자살자가 나오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아울러 그 전까지 쉬쉬하며 묻혔던 자살 사건도 뒤늦게 공개됐다. 1995~ 1996년에 8명이 자살을 시도해 6명이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 1997년에는 전기전자학과 교수마저 수업 부담 등을 이유로 자살하기에 이른다. 언론은 “카이스트의 자살률이 연평균 학생 10만명당 50명에 이른다”라면서 비판했다.

사태 초기 “각각의 사건에 인과관계가 없다. 개인 문제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던 카이스트는 끝내 사회적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학고’의 악몽에 시달렸다. 1996년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매년 카이스트 전체 학부생의 15~18%가 학사경고를 받고, 한 해 입학생의 8.8%가량이 ‘학사경고 누적 3회 시 제적’ 규정에 따라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이스트에서 학사경고 3회로 제적당한 학생이 이듬해 포항공대 입시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연쇄 자살 사건 이후 대학본부는 학사경고 누적 3회면 제적되던 조항을 3회 연속 시 제적으로 바꾸고, 1학년 때는 학사경고에서 면제되도록 했다. 새로 바뀐 제도로 사실상 학사경고 제적 조항은 사문화됐다. 졸업 이수 학점도 140학점에서 130학점으로 낮추었다. 과거에 학사경고로 퇴교당했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조처도 나왔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렇게 학사 행정이 ‘인간적으로’ 바뀌고 나자 카이스트의 자살률은 크게 줄었다. 카이스트 통계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카이스트 자살자는 학부/대학원을 통틀어 연평균 1.14명에 그쳤다. 다른 대학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카이스트에 다시 MIT 바람이 분 것은 2006년부터다. 그해 7월 서남표 MIT 석좌교수가 카이스트 총장으로 취임했다. 서 총장은 ‘MIT 맨’이라고 불릴 만큼 MIT와 인연이 깊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서 총장은 MIT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았고, 교수와 학과장을 지냈다.

 

 

카이스트 학부 과정 이름은 처음에 KIT였다. 1989년 카이스트와 통합됐다.


서 총장의 교육 철학에 MIT가 미친 영향은 크다. 그가 연설을 할 때나 언론 인터뷰를 할 때 MIT를 언급하지 않은 적이 드물다. 2006년 총장 선임이 확정되었을 때 첫마디가 “MIT 혁신의 경험을 살려 카이스트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라는 것이었다. “MIT는 특허를 통해 큰 수입을 벌어들이는데 카이스트는 그렇지 못하다” “MIT의 평균 총장 임기는 10년이다”라며 카이스트의 현실과 MIT를 곧잘 비교했다. 그는 또 “MIT는 정부에서 지원받는 게 많지만 학교가 다 알아서 한다”라며 카이스트를 간섭하려는 교육과학기술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학생의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도 MIT의 기준을 따랐다. 지금은 일반에 익히 알려진 ‘징벌적 등록금’(등록금-학점 연계) 제도를 도입하고 100% 영어 강의를 강제했다. 재수강을 규제하고 A학점 남발도 막았다.

서 총장은 4월8일 학생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학생들은 그가 “MIT 대학 재학 시절에는 소방호스를 입에 물고 물을 붓는 것처럼 공부 양이 많았다” “미국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 등의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서 총장은 '명문대 자살률 발언'은 잘못이라고 정정하면서도 ‘MIT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4월13일 저녁 카이스트 역사상 최초로 열린 학생총회 자리에 서남표 총장이 등장했다. 야외 연단에 오른 서 총장은 이날도 “난 MIT 졸업생이다”라며 MIT를 세 번이나 언급했다. 맨 앞줄에 앉은 학생이 “말씀 중에 죄송한데, 날씨가 너무 추운데…”라고 끊지 않았다면 서남표 총장의 긴 연설은 한동안 더 이어졌을 것이다.

학생들, 스트레스 많으면 자살도 많아

MIT가 명문대라는 것과 이 대학에서 자살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MIT 자살률이 카이스트보다 높을까? 서 총장의 체감 경험과 달리 통계는 서 총장의 상식을 배반하고 있다. MIT 자살률은 카이스트보다 높지 않다(상자기사 참조).

MIT 자살률이 카이스트보다 더 높다는 통념은 통계로 반박할 수 있지만,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률과 학업 스트레스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상식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카이스트 학생 자살 사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원인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지난 20년간 전체 추세를 조망해보면 학업 스트레스가 높았을 때 자살률이 함께 높아짐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학생들의 학업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학사 행정을 개편할 때 박승오 교수(항공우주공학과)는 학생처장이었다. 그는 “당시 제도를 바꾼 것은 학생들이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개교 초기 학교는 미국 대학의 제도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한국은 미국과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했어야 했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미국과 달리 학업에 모든 것을 뒤로 미루다가 대학 1학년 때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인생을 즐기고 여러 고민을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제도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게 15년 전 카이스트가 ‘MIT병’을 앓고 나서 얻은 교훈이었다.

 

1990~2007년 MIT에서 자살한 학생들. 윗줄 맨 왼쪽이 2000년 4월 자살한 엘리자베스 신이다. 부모는 MIT에 책임을 물어 소송을 걸었다.

신씨의 학부모는 MIT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학교가 학생의 심리 상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이 소송은 대학가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의 이슈가 되었다. 〈보스턴 글로브〉 〈뉴욕 타임스〉 등 주요 신문은 “MIT에 자살 문화가 있다”라고 공격했다.  〈보스턴 글로브〉의 비교 연구에서 MIT의 자살률은 다른 대학보다 2배 이상 높았다. 학생 10만명당 자살자 수 비교에서 하버드 대학은 7.4명, 코넬 대학은 5.7명이었다.

MIT의 초기 대응은 카이스트 총장단과 비슷했다. MIT 변호사들은 “일련의 자살과 대학 정책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남학생이 많고, 공대생의 경우에 많다. MIT는 남학생이 많은 공과대학이다. 이런 편차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 종합대학과 싸잡아 자살률을 비교하는 것은 통계학적 오류다”라며 신문 기사를 논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