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4반 김동혁 학생 동생 김예원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100] 이명익 기자 김예원씨(24)는 단원고에 자원 입학했다. 오빠(김동혁, 2학년 4반)가 받지 못한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었다. 참사 희생자의 동생이라는 걸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기에 오빠와 자신의 학생증을 함께 걸고 시작한 학교생활. 하지만 학교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신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상처받을 말과 글은 단원고 안에도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동생으로서 결심한 단원고 졸업. 스스로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저는 오빠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어서 단원고에 갔어요. 생각보다 학교생활은 힘들었어요. 그 일이 일어난 학교인데, 세월호 생존자 화물차 기사 윤길옥씨[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92] 이명익 기자 화물차 운전기사인 윤길옥씨(60)는 제주행 배에 오를 때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는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나마 배에서 잠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화물 기사의 삶은 육지로 오고 가는 삶을 뜻한다. 그는 10년 전 세월호에 올랐던 화물차 기사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하다.“아직도 왼쪽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아요. 두 발의 화상도 이식수술을 계속 해야 하는데 요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3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는데, 오래 하진 못했어요. 다른 일을 좀 하다가 2년 전에 다시 “몸은 어떻게 하겠는데 기억은 안 잊히네요” 이명익 기자 황병주씨(65)는 베테랑 잠수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미 산업 잠수사 경력이 30년에 이르렀다. 2014년 4월20일 첫 잠수를 시작해 7월7일까지 세월호에 있었다. 이후 잠수병을 얻었는데, 해경을 상대로 낸 산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틀에 한 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4월20일 첫 잠수를 했는데 시야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손을 한 번 휘저었는데 한꺼번에 여러 아이들이 잡혔어요. 그 순간 감당을 못하겠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막 목놓아 울면서 누구한테인지 “아직도 선원과 학생들 꿈을 꿔요” 이명익 기자 화물차 운전기사인 윤길옥씨(60)는 제주행 배에 오를 때마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먹는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나마 배에서 잠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화물 기사의 삶은 육지로 오고 가는 삶을 뜻한다. 그는 10년 전 세월호에 올랐던 화물차 기사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한 생존자이기도 하다.“아직도 왼쪽 팔은 끝까지 올라가지 않아요. 두 발의 화상도 이식수술을 계속 해야 하는데 요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3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는데, 오래 하진 못했어요. 다른 일을 좀 하다가 2년 전에 다시 “눈물 나오기 전에 얼른 노래를 불러요” 이명익 기자 가수 요조 씨(42)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기억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도 약해져간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노력한다. 고3이던 동생을 사고로 잃은 이후, 잊지 않기 위해 새기기 시작한 타투처럼, 자신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가진 세월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 ‘연대’라는 알람을 꺼놓지 않으려 한다.“세월호 가족분들의 초청을 받아 안산 행사에 갔어요. 제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다른 가족분이 오셔서 담당자분에게 ‘누구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요조라는 가수분이야.’ 그런데 그 질 “정면 돌파하는 느낌으로 살아요” 이명익 기자 김예원씨(24)는 단원고에 자원 입학했다. 오빠(김동혁, 2학년 4반)가 받지 못한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었다. 참사 희생자의 동생이라는 걸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기에 오빠와 자신의 학생증을 함께 걸고 시작한 학교생활. 하지만 학교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자신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상처받을 말과 글은 단원고 안에도 있었다. 하지만 오빠의 동생으로서 결심한 단원고 졸업. 스스로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저는 오빠 졸업장을 대신 받고 싶어서 단원고에 갔어요. 생각보다 학교생활은 힘들었어요. 그 일이 일어난 학교인데, 임혜림 〈경기신문〉 기자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7] 이명익 기자 〈경기신문〉 임혜림 기자(28)는 수능 대비 인강(인터넷 강의)을 보던 도중 세월호 침몰 소식을 접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3이었기에 단원고 학생들의 일은 더욱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대학 합격 후 광장으로 나왔고 그의 대학 생활은 세월호 활동과 함께였다. 오랜 시간 곁을 내어주던 세월호 가족들은 그가 신문방송학과 학생보다는 기자로서 현장에 나타나주길 바랐다. 그리고 10년. 약간 돌아왔지만 기자로서 세월호 가족들 앞에 섰다.“수능 수시 모집이 딱 끝나자마자 바로 친구들이랑 갔어요. 학교에선 노란 리본을 2학년 10반 김유민 학생 아버지 김영오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86] 이명익 기자 유민이를 떠나보낸 그해. 아빠 김영오씨(56)는 46일 동안 단식을 했다. 40일 단식으로 병원에 입원하고도 단식을 6일 더 이어갔다. 참사의 진실을 밝혀줄 거라 여겼던 ‘세월호 특별법‘이 어렵사리 국회를 통과했지만, 특별법은 정부의 시행령 앞에 무력화됐다. 밝히지 못한 원인, 처벌받지 않은 책임자들. 참사 이후 10년,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말했다. 제2의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건강은 되찾았는데, 예전 같지 않아요. 옛날에는 힘이 센 편이었는데, 단식 끝나고부터 무거운 걸 잘 들지 못해요. 귀농했다가 가수 요조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4] 이명익 기자 가수 요조 씨(42)는 ‘잊지 않겠다’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기억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도 약해져간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노력한다. 고3이던 동생을 사고로 잃은 이후, 잊지 않기 위해 새기기 시작한 타투처럼, 자신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가진 세월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 ‘연대’라는 알람을 꺼놓지 않으려 한다.“세월호 가족분들의 초청을 받아 안산 행사에 갔어요. 제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다른 가족분이 오셔서 담당자분에게 “누구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요조라는 가수분이야.’ 그런데 그 질문은 누 세월호 잠수사 한재명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4] 이명익 기자 세월호 참사 이후 한재명씨(60)의 차에는 항상 수상구조 장비가 실려 있다. 민간 잠수사로 수색 작업에 참여한 그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마음의 빚이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 때 구조에 나선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 후유증이 남았지만 그는 지금도 누군가의 골든타임을 지켜내고 싶어 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 그는 심장제세동기를 구매했다.“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게 알려지고서 ‘이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잠수사들한테 전화를 돌렸어요. ‘혹시 거기 가 계시냐? 가려고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세월호 잠수사 이상진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6] 이명익 기자 이상진씨(60)는 세월호 참사 초기 수색 작업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 중 한 사람이다. 첫 수습자도 그와 함께 뭍으로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여전히 미수습자 가족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저는 인근 해역에서 배를 건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사리(밀물과 썰물 차가 최대인 시기) 때에 작업을 잠깐 멈추고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진 거예요. 해상 크레인 큰 거 있잖아요. 그거 계약금도 걸어놓고 했는데 다 사고가 난 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저도 그냥 보따리 싸서 그쪽으로 세월호 잠수사 백인탁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0] 이명익 기자 백인탁 잠수사(49)는 세월호 참사 때 활동한 민간 잠수사들 중 몇 안 남은 현역 잠수사다. 당시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했다는 육체적·정신적 무게는 참사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오롯이 그들만의 몫으로 남아 있다.“ ‘가자’ 그 한마디뿐이었어요. 그렇게 바로 상진이 형과 보따리 싸가지고 내려갔거든요. 그때 저희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그때 아내는 내가 내려가면 한 일주일 있다 오는 출장인 줄 알았대요. 제가 17일(2014년 4월)에 내려갔을 때 처음엔 배에서 기름을 빼야 한다고 했어요. 배에 올랐는데 해경에 계신 형님이 세월호 잠수사 황병주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8] 이명익 기자 황병주씨(65)는 베테랑 잠수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미 산업 잠수사 경력이 30년에 이르렀다. 2014년 4월20일 첫 잠수를 시작해 7월7일까지 세월호에 있었다. 이후 잠수병을 얻었는데, 해경을 상대로 낸 산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틀에 한 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4월20일 첫 잠수를 했는데 시야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손을 한 번 휘저었는데 한꺼번에 여러 아이들이 잡혔어요. 그 순간 감당을 못하겠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막 목놓아 울면서 누구한테인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한 ‘길바닥’ 박훈규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7] 이명익 기자 세월호 가족들에게 박훈규(51) 독립 PD는 낯선 이름이다. 대신 가족들은 그를 ‘길바닥 또는 '길바닥 저널리스트’로 기억한다. 수많은 언론이 있을 때부터 어떤 언론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7년을 거리 위에서 함께했다."참사가 터지고 4일 지난 뒤에 내려갔어요. 사실 처음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 섰을 때는 그분들 눈을 쳐다보지 못했어요.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질 대로 커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현장에서 보던 상황이 TV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너무 괴리가 크니까 결국 현장에 남아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죠.처음엔 진도와 서 15년 전 그날, 망루에는 사람이 있었다 [포토IN] 이명익 기자 “사실 예전에는 용산 참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사들은 되풀이되고,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어요. 15년 전 일이지만 그냥 계속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잊으면 안 되겠다 싶었고, 그때 몰랐던 걸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아들과 같이 왔어요.”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1월20일 오후, 아들 김재윤 군(12)의 손을 꼭 잡은 신민정씨(45)는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들어선 43층 건물을 일행들이 한 번씩 올려다본 뒤 길 위의 목사 최헌국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3] 이명익 기자 최헌국씨(62)는 거리의 목사, 길 위의 목사로 불린다. 목회를 시작한 1989년부터 그의 예수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서 있었다. 최헌국 목사는 세월호 참사 문제와도 10년을 함께했다."얼마 전 환갑이었는데 저에게 아내가 묻더라구요. 이제는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을 이뤄냈던 것처럼, 세월호 참사도 한국 사회가 새로운 생명안전을 일구어내는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세월호는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이젠 되지 않았느냐’고 쉽게 말을 해요. ‘10년이 지났으니 민간 잠수사 기록 〈로그북〉의 복진오 PD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1] 이명익 기자 기록은 기억보다 잔인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의 참혹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죽음의 각인’인 트라우마로 남았다. 몸이 망가지고 삶도 무너졌다. 복진오 PD의 영화 〈로그북〉은 세월호 참사 이후 민간 잠수사들의 마음에 남긴 항해일지와 같은 기록이다."세월호 초기에 작은 루머가 기사가 되고 어설픈 해프닝이 진실이 되며 언론이 제 역활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한 독립 PD 선배가 그러더라구요. ‘야 안 되겠다. 우리라도 내려가서 제대로 현장을 기록해보자.’ 그래서 무작정 내려갔어요. 힘들게 바지선에 올 우리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포토IN] 이명익 기자 “여기 구미공장은 LG에, 평택공장은 삼성에 납품을 합니다. 구미공장에서 화재가 난 뒤 여기서 납품해야 할 물량을 평택에서 납품하려고 저희 조합원들이 올라가서 스펙 정합(LG의 납품 기준에 맞추는 작업)도 하곤 했어요. 그렇게 일을 해왔는데, 고용승계는 안 된다고 합니다. 다른 법인이라고···.”전화 통화를 하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38)은 ‘다른 법인’이라고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LCD 편광필름을 생산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공장들이 멈춰 서면서 마음으로 운영하는 식당 ‘청년 밥상 문간’ [포토IN] 이명익 기자 “저희 식당은 맛집으로 알려졌으면 해요. 가성비 좋은 맛집이요. 가난하고 어려운 청년을 위한 식당으로만 알려지면 청년들이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거든요. 그냥 그들이 편하고 맛있게 먹고 갈 수 있는 문턱 낮은 식당이었으면 해요.”식탁을 닦는 이문수 신부 어깨 너머로 구수한 밥 냄새가 넘어온다. 주방에서는 솥째 김치를 볶는 냄새가 매콤하게 풍겨왔다. 오전 11시, 식당 문을 열자 어느새 자리는 만석. 각자 취향에 맞게 라면 사리를 추가하거나 고기 사리를 추가할 수 있다.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이지만 밥과 반찬은 무제한이다. 3000원짜리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 이명익 기자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는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간 세월호 참사를 지켜봐온 활동가이자 기록자이며 언론인이다. 미디어몽구는 1인 미디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2005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 2009년 용산 참사 등 사회적 현안을 영상으로 담아왔다. 그의 세월호 취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오랫동안 세월호 가족 곁을 지켜왔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세월호 참사 터지고 바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사흘 뒤에 갔어요. 그때 다른 취재를 하고 있었거든요. 자가용이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