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드 민담’ 가운데서 꽤 유명한 이야기. 한 기혼 여성이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예약했다. 시어머니께 전화로 울먹이며 상황을 털어놓았다.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럼 애비 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부장제와 여성 경시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시어머니는 아들의 한 끼 밥에 집착할망정 며느리의 위급 상황 따위엔 냉혹하기 짝이 없다. 이 민담에서 느낀 섬뜩함을 기획재정부발 뉴스에서 다시 맛본다. 9월 중에 ‘재정준칙’을 내놓는단다.
재정준칙은 정부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일정 비율 내로 제한하는 제도다. 한국의 자칭 시장주의자들과 언론들이 ‘모범’으로 칭송하는 유럽연합(EU)의 ‘안정성장협약(SGP)’이 대표 사례다. EU 회원국들은 연간 재정적자를 GDP의 3% 밑으로, ‘GDP 대비 국가채무(국가채무비율)’ 역시 60%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한다.
국가경제의 빚과 가정경제의 빚은 많이 다르다. 다만 가정경제의 테두리 내 ‘우리 개인’들은 직관적으로 빚에 혐오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니 재정준칙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정부가 단지 인기를 끌기 위해 마구 돈을 뿌려댈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방만한 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백보를 양보해도, 나는 기재부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코로나19의 2차 확산과 불황의 심화, 이에 따른 정부지출 증가의 필요성이 불 보듯 뻔한 지금, 하필 재정준칙을 불쑥 꺼내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EU의 재정준칙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겠다. EU 전체의 국가채무비율은 팬데믹 이전에 이미 80%(60% 이하는 고사하고)를 넘긴 상태였다. 재정준칙 없는 한국은 40%대 중반. 급기야 지난 3월엔 EU 집행위원회가 재정준칙 중단을 선언했다. 상식적 결정이다. 코로나19 위기 같은 상황에선 정부지출 증가가 사실상의 ‘글로벌 스탠더드’다.
제대로 준수되지 않다가 심지어 중단되어버린 EU의 재정준칙이 어쩌다 한국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나? 혹시 현실과 동떨어진 신념에 집착하는 ‘지적 컬트’들이 기재부에 잔뜩 포진하고 있는 것인가? 그나마 기재부는 재정준칙을 ‘경기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한다’는 립서비스 정도는 내놓는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언론은 ‘유연성을 강조하다가 재정준칙을 맹탕으로 만들 것’이라며 분노한다. 어떤 불행한 사태가 휘몰아쳐도 정부는 원칙(정해진 정부지출) 이상으로는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지적 컬트’들은 지킬 수 없는 원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준수하는 고통(주로 남의 고통이지만)에서 쾌감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큰병 걸린 며느리를 위로하고 집안 살림을 보살펴줄 생각은커녕 “그럼 애비 밥은?”이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와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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