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제공경남 창원시 마산의료원 최원호 외과 전문의(왼쪽)는 음압병동 주치의로 코로나19 확진자를 치료하고 있다.

코로나19 전담병원인 마산의료원 소속 최원호 외과 전문의. 그는 현재 수술 대신 음압병동에서 코로나19 확진자를 진료하고 있다. 〈시사IN〉은 그에게 감염병 최일선 현장이 담긴 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현장 의료진들이 모두 고생하고 있는데 저만 주목받는 거 같아서 부담스럽다.” 몇 차례 설득 끝에 그는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써보겠다”라며 원고 청탁에 응했다. 〈시사IN〉은 그의 기록과 추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감염병동 일기’를 소개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3월13일은 코로나19에 감염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처음 들었던 날이다. 코로나19 확진환자들을 치료한 지 3주째 되던 때였다. 확진자에게 쏟아질 비난보다 더 우려스러운 건 병원 내 ‘1번 환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의료진 한 명이 코로나19에 걸리면 병원은 전체 코호트 격리가 된다. 의료 공백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병원에 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몸짓 하나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일상을 기록해두기로 했다. 증상을 느끼기 이틀 전인 3월11일부터 기억을 더듬어갔다. 확진 판정을 받고 나서 접촉자를 다 기억하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3월부터는 병원 숙소에서 머물렀으니 가족을 포함해 외부와 접촉은 없었다. 병원에서 접촉한 사람들, 몸 상태, 그리고 코로나19 전담병원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3월11일부터 일주일간 써 내려간 일기다. 이 글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일선 의료진들이 가진 불안과 고민을 서로 터놓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3월11일 동료들과 간단한 술자리

한 번에 많은 확진자가 본원에 들어온 날이었다. 감염관리실 직원부터 주치의를 맡은 과장까지 갑작스레 쏟아진 업무로 버거워하고 있었다. 선배가 빈대떡과 맥주를 사온 덕분에 원내에서 동료들과 술을 한잔했다. 코로나19 업무를 시작한 이후 첫 회식이자 마지막 회식이었다.

우리 지역 ‘1번 환자’가 음압병동에 입원한 건 3주 전이었다. 병원 이름이 뉴스에 나오자 병원 내부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빗발쳤다. 환자들은 계속 입원을 해도 되는 건지, 예정된 수술을 할 수 있는 건지 불안해했다. 초조한 건 의료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병원에는 감염내과가 없었다. 질병에 관한 데이터가 많지 않았고 작업 매뉴얼도 짜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선별진료소, 응급실, 음압병동까지 인력 배분은 어떻게 할지, 의심환자 동선은 어떻게 짤지, 병상은 어떻게 확보할지 급히 정하느라 방역 계획을 세우던 감염관리실장은 한 달간 퇴근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간호사들은 숙소가 부족해 투석실, 물리치료실에 있는 침대를 이용하거나 바닥에 매트를 깔고 생활 중이었다.

확진환자는 늘어나는데 병원은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웠다. 외과의사인 나는 2월 말 음압병동에 자원했다.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때부터 음압병동 주치의가 되었다.

3월13일 식당에서 점심식사 중 B 과장, C 과장 합석

점심식사 후 감염관리실장님과 병원 뒤쪽 주차장에서 오랜만에 햇볕을 쬐며 한담을 나누었다. 한기를 느낀 건 그날 오후부터였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다. 콧물 같은 상기도 감염 증상은 없었지만 코로나19라는 현재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일주일쯤 동료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몸 상태를 관찰하면 좋으련만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들 힘겹게 버티고 있는데 내부에 불안을 조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생활을 한 지 딱 2주째다. 침대 두 개, 소형 냉장고 한 개, 텔레비전 한 개가 놓인 공간을 A 과장과 함께 쓰고 있다. 숙소는 원래 간호사들이 주로 쓰던 공간이었다. 남자 진료의들이 숙식을 할 수 있는 방 한 곳에 3월1일 짐을 풀었다.

현재 질병관리본부 지침상 보호구를 착용하고 확진환자를 진료한 의료진은 격리가 아닌 자가 모니터링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숙소행을 결심한 건 아이들 때문이었다. 메르스 때 병원 관계자 자녀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코로나19 격리병동에서 일하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등교를 거부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다른 의료진도 대부분 가족을 처가에 보내놓거나, 본인이 나와서 숙소 생활을 하며 가족과 격리하고 있다. 누구든 이렇게 오래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3월14일 식당에서 E 과장 접촉

체온을 재보니 36.7℃로 정상. 마음이 한결 놓였다. 휴일에 숙소에서 혼자 컵라면이나 먹자니 우울해서 ‘밥이라도 잘 먹자’며 병원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하필 E 과장과 딱 마주쳤다. 대각선으로 앉았고 문제될 만한 접촉도 없었지만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내내 불편했다. ‘아니겠지’를 되뇌면서도 혹시라도 확진이 된다면 이게 무슨 민폐일까.

숙소에서 지내니 휴일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보호구를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 매일 음압병동에 들어가는 대신 ‘전화 회진’을 한다. 하루에 한 번씩 환자들과 통화하며 “오늘은 잘 주무셨습니까?” “몸은 좀 어떻습니까?” 하며 환자 상태를 체크한다. 다행히도 우리 병원에는 경증 환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좁은 병실에 갇혀서 생활한 지도 3주가 넘어간다. 대부분 밤낮이 바뀌었다. 블라인드를 걷고 햇볕이라도 쬐면 좀 나을 텐데, 바로 밖이 도로이다 보니 사진 찍히거나 민원이 들어올까 봐 거의 열지 못한다. 누구라도, 어디라도 탈이 안 난 게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저도 오늘 멀리 못 가고 담 너머에 있어요”라고 위로를 건넸더니 환자가 깔깔 웃는다.

ⓒ연합뉴스2월21일 마산의료원 선별진료소 앞에서 한 시민이 의료진의 안내를 받고 있다.

3월15일 식당에서는 조리사와 2m 간격 유지. 저녁은 아내가 주문해준 통닭. 배달 기사님이 두고 간 뒤 들고 들어옴

상기도 증상은 없지만 몸이 전반적으로 찌뿌둥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먹고 잔 지 2주째니 몸이 편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업무량은 평소보다 많지 않다. 코로나19 환자만 받다 보니 수술도 없는 데다 주치의들은 특이 사항이 있을 때만 음압병실에 들어간다. 처음 보호구를 착용하고 회진 도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시간이 단축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월16일 식당에서 동료들과 2m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 그 외 숙소에서 B 과장, E 과장 만남

오후 진료 전에 발열을 측정했다. 36.7℃. 속으로 깊이 안도했지만 최소 1주일 이상은 동료들과도 마스크를 끼지 않고는 접촉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숙소를 같이 쓰고 있는 A 과장이 문제였다. 내 상태를 알리기로 했다. ‘대안이 있다면 다른 방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A 과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저도 살짝 고민은 했는데, 어차피 갈 데가 없더라고요.”

사실 대안이 없었다.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된 다른 병원 사례를 전해 들었다. 의료진이 묵고 있는 호텔이 알려지자 주민들의 우려와 반발이 이어져 결국 호텔을 떠났다고 한다. 최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지난주에 수술복을 입고 병원 밖을 잠시 나섰다가 주민 민원이 발생한 것이다. 병원 숙소로 주소를 찍으면 배달을 하지 않겠다는 식당도 있었다.

3월17일 C 과장과 마스크 쓰고 3분 정도 대화. 음압병동 들어가기 전 체온 측정 36.4℃

새벽 일찍 잠이 깼다. 한기는 아니지만 추운 느낌이 계속 든다. 방이 조금 춥다. 어제 보니 A 과장도 계속 재채기를 하던데 우리는 서로 ‘폭탄 돌리고 있는 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불안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깨닫는다. 내 몸의 모든 변화에서 징후를 찾는다. 새벽에 찬 공기에 몸을 잠시 떤 것도, 나오는 재채기에도 ‘감염된 걸까’ 하는 의심이 든다. 오늘따라 담배가 안 당길 수도 있고, 평소와 달리 한쪽 눈이 충혈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징후들이 이제는 몹시 걱정스러워졌다. 온갖 생각이 든다. 작년 아이들에게 아데노 눈병과 수족구를 옮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내 몸이 바이러스 질환에 유난히 더 취약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든다. 반박할 근거가 수두룩하겠지만, 괜히 그렇다. 충분히 바이러스 질환에 대해 공부했고 직접 겪어서 그 위험성이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위축된다. 다른 이의 불안에 좀 더 관대해지기 위해 애써야겠다. 어쨌거나 내가 더 전문가이니까.

3월17일 퇴원 환자에게서 받은 편지

“저는 가해자니까….” 새로 들어온 환자들과 전화로 30여 분 면담을 하던 중 환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코로나19가 당장 자신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보다, 혹시 다른 이들에게 옮겼을지 먼저 걱정했다. 자책보다 치유에 힘쓰시라고 말씀드렸는데, 마음이 울컥한다. 환자일 뿐인데 감염질환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부담을 진다.

확진자로 판명되면 시간별 동선이 모두 공개된다. 그것이 환자 개개인에게 주는 불안감을 가까이서 보았다. 명예를 실추시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하고, ‘마녀사냥식’ 과도한 신상 공개로 상처를 입기도 했다. 몇 번이고 나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던 이도 있다. 감염질환은 개인이 잘못해서 걸리는 게 아닌데 사회적 시선은 너무도 차갑다는 것을 느낀다.

오후에 퇴원을 앞둔 환자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퇴원하고 나면 사실 환자의 반응을 직접 들을 일이 거의 없는데 빼곡히 적힌 글을 읽으면서 울컥했다.

“저 같은 경우는 입원 기간이 꽤 되었습니다. 지난주 검사까지 양성이 나올 만큼 체내에 바이러스가 계속 남아 있었는데도 입원 후 지금까지 증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원 중에도 약을 전혀 복용하지 않았어요. 자연 회복되어 이제 퇴원을 준비합니다. 알려진 대로 이번 코로나19는 일부 고위험군에게 치명적일지 모르나, 그 외의 분들에게는 혹시 감염이 되더라도 저처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매일 수차례 꼼꼼하게 체크해주시는 간호사분들과, 환자 입장에서 생각해주시고 정보를 공유해주시는 담당 의사 선생님 덕분에 쉽게 치료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이 기회를 통해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이 같은 공공병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이 시국에 퇴원 소식만큼 기쁜 게 없다. ‘역시 이 맛에 의사 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원호 제공최원호 외과 전문의는 한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위는 최원호 전문의의 자녀와 시민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

3월18일 출근길에 G 과장 만남. 점심식사 ‘혼밥’ 중에 C 과장 합석. 수술실 스크럽 쌤(수술 도와주는 간호사) 만나 짧게 대화

음압병동에서 한 시간 정도 검사 및 회진을 돌았다. 보호구를 벗으니 땀범벅이다. 샤워하고 바로 체온을 쟀더니 37.1℃이다. 동료들과 노닥거리다가 다시 재니 36.7℃이다. 체온을 수시로 재는 버릇이 생겼다.

아내와 연락을 했다. 애들이 무서워하며 밤에 자꾸 깬단다. 아이들을 못 본 지 3주가 다 되어간다. 많이 보고 싶다. 일곱 살 둘째는 통화할 때마다 “몇 밤 자면 오냐”라고 묻는다. 몇 주째 “모른다. 모른다”라고만 말하다 결국 “열 밤”이라고 말해버렸다. 기억을 못할 줄 알았는데 아이가 하루하루 세고 있단다. 열 밤째가 다가오는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열 살인 첫째는 자주 “사랑해”라고 말한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써 웃지만, 끊고 나면 가슴이 쿵쿵 요동치는 것 같다. 천만 리 떨어져 죽을 곳에 온 것도 아니면서.

사람은 역시 기대어 살아야 하나 보다.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고립된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건드리면 욱하고, 쓰다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특히 요 며칠은 더더욱. ‘거리두기’라 쓰고 ‘피해 다니기’라고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병원을 누비다 보면 때로 내가 바퀴벌레 같기도 하다.

3월18일 교체 인력이 거의 없는 간호사들

자정. ‘수쌤(수간호사 선생님)’들이 아직도 당직을 서고 있다. 하루 세 번 혈압과 체온을 측정하고 세끼 식사와 정규 투약을 나른다. 요양보호사와 함께 병실과 복도를 청소하는 일도 한다. 음압병동에 가장 먼저 투입된 간호사들은 한 달째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교체 인력이 없다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큰 문제라 ‘아파서 며칠 쉬겠다’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 명이 쉬면 다른 누군가가 그 공백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다. 때마침 환절기라 기침 한 번, 콧물 한 번 안 흘린 사람이 없을 텐데…. 증상이 있고 불편함이 있다면 쉬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조치를 받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부터도 ‘유난 떤다’는 표현은 삼가도록 해야겠다.

ⓒ최원호 제공마산의료원에서 음압병동에 들어가기 전 레벨 D 보호구를 착용한 간호사들의 모습. 간호사들은 환자 혈압 및 체온 측정, 배식, 청소 등의 업무를 도맡고 있다.

3월19일 체온 36.7℃. 발열 없음

A 과장의 기침 소리에 잠을 깼다. 이쯤 되니 누구 한 명이 잘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몇 번 환자가 어디를 갔고 누구를 접촉했는지 떠들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일일이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일까. 병원만 해도 숙소부터 탈의실까지 원내 곳곳이 다 밀접 접촉지다.

의료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의사가 맡은 일은 일부일 뿐이다. 간호사, 요양보호사, 조리사, 청소 여사님, 원무과, 임상병리사도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환자의 동의와 협조도 중요하다. 어느 한 군데라도 어긋나거나 빠지면 구멍이 뚫리는 게 의료체계라는 사실을, 사무치게 공감하는 요즘이다.

어제 환자 2명의 1차 재검사 결과가 음성임을 통보받았다. 둘 다 3주 넘게 입원했던 환자다. 24시간이 지난 오늘 2차 재검사까지 음성이 나오면 퇴원이 이루어진다. 다행히 환자가 많이 줄고 있다. 3월25일 기준으로 우리 병원에서 70여 명이 퇴원했고, 30명 정도가 남아 있다.

업무 전 체온을 재보니 36.7℃다. 이제 기록은 그만둘 생각이다. 이 기록을 통해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면 설령 내가 코로나19에 걸렸다 하더라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민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일기를 쓰면서 불안과 상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 아파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나도 사실 불안했다’는 위안을 주고 싶다. 코로나19 앞에서 누구라도 불안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결국 이 위기를 함께 이겨낼 수밖에 없다. 물리적 거리를 두더라도 ‘사회적(관계적) 거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그렇게 ‘잘’ 이겨내고 있음을 믿는다.

기자명 최원호 (마산의료원 외과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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