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凡人)은 법대에 앉은 ‘판사님’ 눈치를 본다. ‘검사님’ 심기도 살핀다. 화가 나도 꾹 참는다. 사법부 최고 수장을 지낸 이는 달랐다. 홈그라운드에 선 선수인 양 거침이 없었다. 후배 법관 앞에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이 시작되었다. 양승태 피고인과 변호인들은 선수답게 ‘법대로’를 주장했다. 첫 재판 때 재판장은 피고인의 이름, 주소, 직업 등을 묻는 인정신문을 한다(형사소송법 제284조). 그런 다음 검사는 공소장에 나온 공소사실, 죄명, 적용 법조를 낭독한다(같은 법 제285조, 검사의 모두진술). 검사는 보통 이때 입증 계획까지 포함해 설명한다. 양승태 피고인과 변호인은 “피고인 모두진술이 끝나고 입증 계획을 설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에 나온 대로 하자고 했다. 재판부가 받아들였고 변호인이 모두진술을 하려 하자, 이번엔 검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피고인은 검사의 모두진술이 끝난 뒤에 공소사실의 인정 여부를 진술하여야 한다(같은 법 제286조, 피고인의 모두진술)’는 조항을 근거로 변호인이 아니라 피고인이 직접 나서라고 반박했다. 법대 위에선 편의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던 이들이, 피고인석에 앉자 법전에 나온 절차를 중시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후배 법조인들은 이들의 주장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 법정 안에서 인권이 개선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인식의 차이다. 양승태 피고인,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은 사법농단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종헌 피고인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전·현직 판사들은 “지시에 따르며 부담감을 느꼈다” “지금은 후회한다”라며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인식의 괴리가 피고인과 증인의 신분 차이라고 보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법 개혁, 사법 민주화 등에 대한 성찰의 차이다.
〈시사IN〉이 다시 이탄희 전 판사에게 주목하는 이유다. 이 전 판사는 사법농단 의혹을 세상에 드러낸 ‘트리거(방아쇠)’다. 그는 직을 걸고 ‘사법부가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삼권분립은 삼권 분리가 아니다. 누워 있는 기관을 다른 두 기관이 협력해 제대로 세워야 한다”라는 이 전 판사의 말처럼 법원에만 맡겨서도 안 된다.
법원뿐 아니라 시민 사회에서, 언론이라는 공론장에서 논쟁을 하며 답을 찾아가야 한다. 사법 개혁이 수사와 재판을 통한 단죄로만 끝난다면, 과연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있을까? 양승태 피고인 법정에는 시민단체 소속 시민들이 매번 방청한다. 그들의 옷에는 ‘두눈부릅’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시사IN〉도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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