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영화 속 각종 범죄 현장에 그가 있었다. 때로는 형사로 (〈추격자〉), 때로는 범인으로(〈황해〉), 기필코 잡고야 마는 집념의 사내였다가 (〈거북이 달린다〉),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악의 화신(〈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으로 돌변했다. 그와 같은 편이면 안심했고 그를 적으로 둔 자들은 겁에 질렸다. 김윤석은 그런 배우다. 제압할 수 없는 상대이자 넘을 수 없는 산이면서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아저씨, 아니, 아버지.

감독으로 첫 작품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벌써 오금이 저리는 것 같았다. 잡히지도 않은 멱살에 숨이 막히고,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함몰되는 기분이었다. 왠지 그런 영화를 찍을 것 같았다. 김윤석이라는 사람은, 왠지 ‘그런 영화’를 찍는 게 어울릴 것만 같았다. 제목도 ‘미성년’이라니. 아무래도 촉법소년의 극악한 범죄 행각을 그리려나 보다, 각오 단단히 하고서 영화를 보러 갔다.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두 명이 주인공이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는 학교 옥상에서 단둘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알아?”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배의 주인은 윤아의 엄마 미희(김소진). 주리의 아빠 대원(김윤석)과 사랑에 빠져 덜컥, 아이가 생겨버렸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아버린 주리는 엄마 영주(염정아)가 끝까지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라지만, 세상일이 한낱 ‘고딩’ 뜻대로 돌아갈 리 없다. 비밀은 폭로되고 거짓말은 들통나며 두 가족은 한 덩어리로 뒤엉킨다.

오랜만에 만나는 매력적인 한국 영화

불륜은 흔한 소재다. 그러나 불륜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미성년〉이 풀어가는 방식은 하나도 흔하지 않다. 여고생 성장 드라마는 뻔한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성장의 궤적과 방향을 그려내는 연출이 신선하고 경쾌했다. 이 영화엔 설교가 없고, 억지가 없으며, 서툰 화해나 섣부른 비약도 없다. 무엇보다 낭비되는 요소가 없다. 인물의 감정도, 캐릭터의 쓰임새도, 모든 면에서 알맞고 알차다. 영화감독 김윤석은, ‘그런 영화’를 만들 거라는 나의 막연했던 예상을 자신의 손가락 끝에 코딱지처럼 올려놓고 내내 갖고 놀다가, 결국 라스트신에 이르러 팅, 저 멀리 튕겨내고 있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한국 영화를 본 게 얼마 만인지, 하도 반가운 마음에 덥석, 영화를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한 장면. 수업 땡땡이 치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주리와 윤아에게 선생님(김희원)이 엄포를 놓는다. “너네 이대로 나가면 큰일 나!” 그때 아이들이 선생님을 돌아보며 내뱉는 한마디. “거짓말!” 이 세 음절 앞에서 세상 모든 어른은 할 말을 잃고 만다. 단단한 ‘미성년’이, 푸석한 ‘성년’들에게 날리는 통쾌한 한 방.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 거짓말이야. 큰일 안 나. 고작 그런 어른에게 주눅 들면, 그게 진짜 큰일이야.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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