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은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여행의 시작인 이유는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섬 여행을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또 그만큼 일상과의 단절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일상과 단절된 나만의 시간이다. 섬 여행은 짧은 여행으로도 이런 단절을 경험할 수 있다.

여행의 끝인 이유는 전남 고흥군의 연홍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고 구본무 LG 회장이 1년에 한 번씩 다녀간다는 집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가 민박집도 아닌 평범한 가정집인 이곳에 묵으면서 산책을 하거나 낚시를 하고 간다고 했다. 그때 기자와 함께 간 청년들에게 “봐라, 섬 여행이 여행의 끝이다. 여러 나라의 고급 리조트를 다 다녀보았을 재벌 회장이 말년에 찾는 곳도 섬이다”라고 설파했다(2017년 봄, 기자의 고향인 전남 영광군의 섬 낙월도를 다녀온 후 함께 갔던 사람들과 도시인을 위한 섬 여행 그룹 ‘시밸리우스’를 만들기도 했다).

ⓒ김도균 제공전남 신안군 우이도 성촌해변(사진)은 아무런 시설물이 없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섬 여행을 하면서 ‘차가운 도시인’에서 ‘따뜻한 자연인’으로 거듭나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하루에 서너 번씩 샤워를 해야 하고,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던 이성원씨(45)가 대표적이다. 섬이 주는 ‘불편한 사치’를 사랑하기 시작한 그는 “섬 여행은 클래식 자동차와 같다. 불편함을 즐기게 되고 불편함을 사랑하게 된다. 편한 세상에서 이제는 불편함을 찾아 즐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씨가 섬 여행의 매력을 발견한 곳은 인천 옹진군의 덕적도였다. 덕적도는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섬이다. 섬을 좋아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나서 게스트하우스에 외국인 손님도 제법 드나든다. 내국인 중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고 캠퍼들도 자주 찾는데 서포리 해변에서 숙영한다. 바다를 보러 간다고 하면 보통 동해안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개펄이 있는 서해안보다 동해 바다가 더 멋지다며. 그런데 외국인들은 왜 덕적도에 갈까? 그곳에서는 맑은 바다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덕적도나 백령도· 대청도·소청도 등 해안에서 먼 섬의 해변은 대부분 물이 맑다. 이성원씨가 캠핑을 했던 덕적도의 능동자갈마당은 공룡 알만 한 몽돌이 깔린 해변인데 맑은 바다를 볼 수 있다.

덕적도에는 소야도를 비롯해 굴업도·문갑도 등 딸린 섬이 많다. 이들을 덕적군도라 부르는데 덕적도 이상의 풍광을 볼 수 있다. 다만 접근성이 좋지 않다.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중 굴업도는 캠퍼들의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굴업도 개머리언덕 초지는 바람은 세차지만 멋진 캠핑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 인기가 있다(굴업도는 섬의 대부분을 한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지만 캠핑이나 트레킹을 엄격하게 금하지는 않는다). 넓은 개활지에 바람이 불어 풀이 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대영 제공섬에서는 어른도 아이처럼 개구지게
놀게 된다.

ⓒ정수미 제공제철 해산물이 풍부할 때
섬에 가면 멋진 ‘섬 밥상’을 맛볼 수 있다(아래).

굴업도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문갑도도 멋진 섬이다. 초지는 굴업도가 아름답지만 해변은 문갑도가 더 윗길이다. 한월리 해변을 비롯해 한적한 해변이 섬 이곳저곳에 있다. 인적이 드물어 ‘프라이빗 비치’를 즐길 수 있다. 선비의 문갑을 닮았다고 해서 문갑도인데 한적해서 책 읽기 좋은 섬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 행복한 섬 여행

관광객이 자주 찾는 몇몇 섬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섬은 ‘허름하다’는 느낌을 준다. 풍경은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물론 섬 중에 시설 과잉인 곳도 있다. 개발독재 시대에 열심히 일하던 한국인이 ‘오늘만 날이다’라는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겼던 행락의 잔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쇠락의 징표가 되었다.

섬 여행은 아이러니하다.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점이 도시인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어찌 보면 섬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정이나 새벽에 나서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항구에 가서 배를 이용해 섬에 들어가 또 거기서도 한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다. 민박이나 식당이 없어 숙식을 해야 할 때는 등에 짐을 한 보따리 지고 가야 한다. 그렇게 분주하게 가서는 정작 섬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섬을 즐기는 방식이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김도균씨(47)가 섬을 찾는 이유도 ‘무위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남 신안군 우이도의 성촌해변에서 ‘멍때리기’를 좋아한다며 “모래사장만 있으면 파라솔을 치고 해수욕장을 만드는 한국의 풍토에서 날것 그대로의 해안가는 꽤나 이국적이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손가락 마디만 한 방게 수천 마리가 일광욕을 하다 인기척에 흩어진다. 이런 섬은 즐기는 섬이 아니라 관조하는 섬이다”라고 묘사했다.

대부분의 섬은 산책하기에 좋다. 울릉도를 제외하고는 산세가 험하지 않고 능선을 타고 오르면 섬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길을 잃을 위험이 거의 없다. ‘걷기 좋은 섬’을 만든다며 보행 데크를 깔아둔 곳도 많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벤치를 설치해둔 곳도 많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시설이다.

섬에서 산책하다 보면 뜻밖의 시설을 발견하기도 한다.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동 시설을 넝쿨식물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볼 때마다 누가 이용할지 의문이 든다. 매일 일하는 섬 어르신들에게 인가 주변도 아닌 이곳까지 와서 이용하라는 것인지, 우리처럼 산책하는 사람이 잠시 쉴 때 그냥 쉬지 말고 운동이라도 하라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정수미 제공섬의 시간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지보다 빨리 간다. 전남 신안군 우이도.

직장인 정수미씨(35)는 우이도를 다녀와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섬 해변을 거닐면서 바닷가의 들고 나는 파도처럼 당연하게, 오늘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은 다른 시간을 살게 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섬은 어른을 ‘어른이’로 만들어준다. 증권사에 다니는 김대영씨(45)는 “섬에 가면 고립되고 단절되는 대신 자유를 얻는다. 특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섬의 푸른 바다는 일순간에 동심을 깨워준다. 체면이고 뭐고, 수영을 할 줄 알든 모르든 바다로 풍덩 뛰어들고 싶어진다. 섬은 ‘어른이’들을 위한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그냥 물 위에서 혹은 바위 위에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라고 말했다.

섬은 지친 도시인에게 친구가 되어준다. 우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다. 그래서 위로가 된다. 배우 안홍진씨(45)의 말이다. “배우라는 존재는 대중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 어떤 배우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끊임없이 자책하고 어떤 배우는 지나친 관심에 미칠 듯 괴로워한다. 바다에서 그 섬을 바라보는 것과 섬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다르듯 배우와 대중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아픈 쪽은 배우다. 그런 내 얘기를 섬이 조용히 들어주는 것 같다.”

섬에 오는 도시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섬의 시계는 두 배로 빠르다. 섬사람은 해의 시계와 달의 시계, 이 두 시계에 모두 맞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은 아무리 분주해도 해의 시계에만 맞춰 살면 된다. 섬사람은 달의 시계(물때)에도 맞춰 살아야 바다가 주는 풍요를 누릴 수 있다.

시간만 두 배로 쓰는 것이 아니다. 역할도 몇 배로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배우 송강호를 닮은 전남 보성군 장도의 이장은 아침에는 우체부, 낮에는 어촌계장, 오후에는 섬농부, 저녁에는 이장, 돼지를 잡을 때는 도축사, 환자가 생기면 앰뷸런스 배의 선장이 된다. 도시에서는 쉽게 제공받을 수 있는 용역 서비스가 섬에는 없기 때문에 다들 여러 역할을 해야 한다.

ⓒ시사IN 고재열가을 추자도에서는 한라산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섬 어르신들은 쓰레기를 치울 겨를과 기력이 없어 섬 해변에는 유난히 쓰레기가 많다. 강기태 여행대학 총장은 역발상으로 이 해양 쓰레기를 치우는 여행을 기획했다. 그가 모집한 섬청년탐사대 대원들은 전남 진도군 관매도와 인천 옹진군의 문갑도를 세 차례씩 찾아 섬의 쓰레기를 치웠다. 누가 이런 여행을 할까 싶었지만 지원자가 많아 면접을 해야 할 정도였다.

서해 섬 여행은 늦여름~초가을이 제철

섬 여행은 여러 면에서 불편하다. 여객선 통합 예약 사이트인 ‘가고 싶은 섬’에서 예약이 되지 않는 항로도 허다하다. 전남 영광군 낙월도에 들어갈 때는 배가 출발하기 30분 전까지 표를 살 수도 없다. 표를 살 수 있는지 알 수도 없다. 배가 출발하기 30분 전쯤 판매원이 카드 리더기를 들고 나타난다.

섬에 대한 정보도 턱없이 부족하다. 섬에서 캠핑을 하거나 트레킹을 한 사람이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다. 어디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다. 이런 장벽이 있어 섬은 ‘불편한 사치’를 누리려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허락한다. 섬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손발이 부지런해야 한다. 교통수단이 미흡한 곳이 많아 발이 부지런해야 하고 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때는 손이 부지런해야 한다.

섬에 가기 전에는 지도를 대충이라도 봐두는 것이 좋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최대한 확대해서 섬의 길이나 등산로를 따라 트레킹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가면 동선이 선명해진다. 지도를 볼 때 보통 해변에 주목하는데 폐교를 찾아두면 유용하다. 섬의 학교는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기부채납한 땅에 지어지는데 입지가 가장 좋은 곳에 있다. 화가 손원영씨(46)는 “대매물도 폐교 캠핑장은 높은 곳에 위치해 섬의 여러 곳을 두루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조망은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다. 한쪽으로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일몰을 볼 수 있는 드문 곳이다”라고 말했다.

섬은 언제나 좋지만 유난히 좋은 계절이 있다. 덕적군도의 섬과 같은 서해 섬은 늦여름에서 초가을이 가장 좋다. 바닷바람이 습하지 않고 극성스럽던 섬모기도 잦아들기 때문이다. 반면 서해 섬의 봄은 늦게 온다. 북서풍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늦여름에서 초가을의 서해 섬에서는 멋진 석양을 감상할 수 있다. 동남아 휴양지의 석양이 이글이글한 유화라면 서해 섬의 석양은 고요한 파스텔화다. 담백하면서도 아련하다. 동해에서 보는 일출은 해가 뜨면 상황 종료지만 서해 섬의 일출은 잔상이 길게 이어진다.

남해 섬은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까지 좋다. 육지가 북서풍을 막아줘서 아직 포근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보면 차령산맥이나 노령산맥의 북쪽 사면에는 눈이 쌓여 있는데 남도 섬에는 아직 가을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추에 갔던 추자도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이때 추자도에 가면 한라산의 능선을 온전히 구경할 수 있다. 아련히 보이는 한라산의 능선이 보아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데 한라산을 보고 싶으면 추자도로 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봄과 여름 동안 잡은 생선을 말리거나 동결 건조한 것을 사서 구워 먹으면 평생 먹을 수 없는 크기의 생선을 평생 먹을 수 없는 맛으로 먹을 수 있다.

겨울 섬은 다소 척박하다. 하지만 제철 해산물이 있는 곳에 가면 인심이 후하다. 물메기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경남 통영군의 추도를 권하고 싶다. 물메기가 한창일 때다. 마을 곳곳에서 물메기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메기탕, 물메기무침, 반건조 물메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물메기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겨울에 좋은 섬으로는 꼬막 섬 장도(전남 보성군)를 꼽을 수 있다. 벌교에 꼬막 식당이 즐비한데 대부분 이 장도에서 올라온 꼬막이다. 장도에서는 마을기업이 운영하는 숙박시설과 섬 밥상이 있어 진짜 꼬막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고재갑 제공숙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면 더 다양한 섬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 위는 제주 비양도에서 캠핑하는 모습.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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