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학적 무의식 혹은 시각적 무의식(das Optisch-Unbewuβte)이라고 번역되는 말이 있다. 원래는 발터 베냐민이 영화에 쓰이는 카메라의 기술적 기능을 가리킨 말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진에도 널리 쓰여 사진적 무의식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사진적 무의식이란 사진과 영화에 쓰이는 카메라가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대상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사실이 카메라에 잡히는 걸 뜻하기도 한다.

발터 베냐민의 말대로 클로즈업 기법이나 고속 촬영 기법이 그것이다. 클로즈업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물을 자세히 확대해 들여다보아 시각적 확장을 가져오고, 고속 촬영 속에서는 대상의 움직임이 연장된다. 베냐민은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을 정신분석에 비유해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에 재발매된 가수 박인희(아래 왼쪽)·양희은(아래 오른쪽)의 음반 커버 사진.
사진 속에는 ‘의도하지 않은 1970년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른 한편의 사진적 무의식은 의도하지 않은 사물과 디테일이 사진에 담기는 일이다. 사진가는 찍히는 대상을 완전히 통제하지도 못하고 뷰 파인더에 담긴 모든 것을 보고 촬영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진은 늘 우연에 노출되어 있고 그 우연이 사진의 무의식,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 무의식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 무의식이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그렇다.

사진적 무의식은 결국 사회적 무의식

예를 들어 재개발 지역에서 주운 음반 사진을 보자. 존 레넌, 마돈나부터 노래를찾는사람들 1·2·3집, 변진섭 등이 주였고, 박인희와 양희은의 레코드도 있었다. 포크송 가수인 박인희와 양희은 레코드는 1970년대에 발매된 음반인데 이상하다 싶어서 알아보니 1990년대에 재발매된 적이 있었다. 두 음반 모두 젊은 박인희와 양희은의 사진을 커버에 쓰고 있었다.

박인희는 기타 케이스를 들고 한강변으로 짐작되는 곳 다리 아래에 서 있고, 양희은은 낙서가 가득한 어느 한옥 벽에 다리를 꼬고 기대서 있다. 이 복제된 사진들 속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사진적 무의식 같은 것이 눈에 띈다. 먼저 두 사람이 입은, 1970년대에 유행했던 판탈롱 스타일 바지에 눈이 간다. 바지의 폭이 12~13인치를 오가던 시절이라는 증거다. 사진가가 이런 점을 고려해서 찍지는 않았을 터이니 사진가의 의식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박인희 사진의 배경이 되는 한강 다리의 모습, 다리 주변의 모래밭, 둥근 콘크리트 관 역시 통제 밖의 사물이다. 양희은의 사진에 등장하는 담벼락에 쓰인 낙서 속의 이름과 욕설, 토관을 이어 만든 굴뚝 역시 통제 밖의 사안이다. 사진을 찍고 사용했던 사람들 모두 아마 마찬가지였으리라. 어쩌면 사진의 가장 독특한 점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사진이란 의도한 것만 기록하는 작업은 결코 아니며 의도 밖의 것들이 또 한 세상을 이룬다. 사진적 무의식은 결국 사회적 무의식이기도 하며, 다른 시각 매체들은 갖고 있지 않은 사진만의 영역이기도 하다.

기자명 강홍구 (사진가·고은사진미술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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