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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팬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할 추리문학관은 셜록 홈스를 비롯해 3만5000권이 넘는 장서를 자랑한다.

자고로 여행이란 떠나 있는 순간보다 떠남을 준비하는 과정이 더 설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지도를 보며 여행 동선을 꼼꼼히 체크하는 것이 백미다. 잠깐 그 재미를 느껴보기로 하자.

네이버·다음·구글 어느 것이든 좋으니 지도 서비스에서 해운대를 한번 띄워보자. 이왕이면 위성지도가 더 낫다. 가장 왼쪽에는 동백섬이 있다. 그 오른쪽으로 초승달 모양의 해운대해수욕장이 펼쳐진다. 해운대 여행은 대부분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런데 이러면 해운대를 절반밖에 즐기지 못한 것이다. 시야를 조금 더 오른쪽으로 옮기면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튀어나온 지형이 보인다. 부산 사람들이 ‘달맞이언덕’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쯤에서 지도를 확대해보자. 해안선을 따라 철길이 이어지고, 빼곡한 숲을 따라 도로가 이어진다. 달맞이언덕을 오르는 길이라 하여 ‘달맞이길’이라 이름 붙었다.

달맞이길은 그 자체로 아름답거니와 개발과 보전의 경계라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길 위로는 아파트·빌라·개인주택 등이 무분별하게 들어선 반면 길 아래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에 동백숲과 소나무숲이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이 숲속에는 선탠에 빗대 이름 붙인 ‘문탠로드’라는 산책길이 있다. 영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지만 외화번역가 이미도씨마저 감탄케 할 정도로 기발한 작명이다. 울창한 숲과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들리는 파도 소리가 연출하는 분위기는 진정한 ‘4D’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미포·청사포·구덕포라는 작은 포구마을을 이어주는 길이라는 뜻에서 ‘삼포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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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북카페(위)는 마치 유럽 고성의 서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독서와 사색과 대화가 어울리는 곳

달맞이길 혹은 문탠로드를 따라 언덕을 오르다보면, 그 끝자락에 ‘추리문학관’이 있다. 수년 전부터 지방자치단체마다 작가나 작가의 작품을 테마로 한 문학관 건립이 붐을 이루었다. 추리문학관은 이러한 붐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92년, 추리소설가 김성종 선생이 사재를 털어 만든 대한민국 제1호 문학관이다. 이는 추리문학이라는 장르를 특화한 국내 최초의 전문 도서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에서 고작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문학관은 그 입지부터 각별하다. 3만5000권이 넘는 장서는 보기만 해도 감성을 자극한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그 감성은 극대화된다. ‘셜록 홈스의 집’이라 이름 붙은 1층 북카페는 마치 유럽 고성의 서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잘 가꾸어진 꽃과 식물들로 언제나 온기가 넘친다. 바다를 향해 큰 창이 난 2, 3층 열람실은 공공도서관의 딱딱한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문학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해도 기능적으로 볼 때, 이곳은 오히려 독서와 사색 그리고 대화가 어울리는 ‘제3의 장소(The third place)’에 가깝다.

1992년 개관한 문학관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다른 문학관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비가 지원되고 관리를 위한 공무원이 파견된다고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김성종 선생 개인의 힘으로 유지돼왔다. 그래서 한때는 폐관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뜻있는 시민들이 후원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뒤늦게 부산시에서 약간의 보조금이 지원되지만 운영하기가 여전히 녹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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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추리문학관(왼쪽)은 1992년 김성종 선생이 사재를 털어 만든 대한민국 제1호 문학관이다.

 

문화 생태계를 보존하는 공간

지난겨울, 김성종 선생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올해 일흔이 된 작가는 추리문학관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한때는 애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선택을 숙명으로 생각하며 평생을 머물겠다고 했다. 노작가는 추리문학관 4층에 있는 개인 공간에서 여전히 왕성한 집필 작업을 한다.

전남 구례가 고향인 김성종 선생은 해운대 바다에 반하고, 달맞이고개의 문화적 가능성에 이끌려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한국의 헤이온와이(영국 웨일스의 유명한 책마을)를 꿈꿨지만 난개발 때문에 그 꿈은 잠시 접었다. 하지만 매년 8월 초가 되면 그 이름조차 의미심장한 ‘달맞이언덕 철학축제’가 13년째 개최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화랑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해 이제는 20여 곳을 헤아린다. 개발제한구역이 달맞이언덕의 생물학적 생태계를 보존하는 장치였다면, 추리문학관은 문화적 생태계를 보존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건물과 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낡고 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은 건물과 책에는 생명이 깃든다. 그래서 도서관은 새로 생긴 곳보다는 오래된 곳일수록 편안하다.

올여름, 수십만 인파를 잠시 뒤로하고 30분가량 달맞이언덕에 올라보는 것은 어떨까? 땀으로 젖은 몸은 추리소설로 식혀보기로 하자. 피곤함과 긴장감이 어우러져 살짝 졸음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즐겨보자. 두어 시간 책을 읽다보면 광안대교 너머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때쯤 다시 바다로 내려오자. 내려오는 길은 문탠로드가 제격이다. 길바닥에 낮게 깔린 조명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행여나 보름달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3대가 쌓아놓은 덕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관람 정보

주소: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1483-6
관람 시간:오전 9시~오후 7시
휴관일:연중 무휴
관람료:어른 5000원(음료 포함), 중고생 4000원, 초등학생 3000원
전화:051-743-0480
홈페이지:없음
놓치지 마시라:두어 시간 추리소설을 읽고 ‘문탠로드’를 따라 내려오면서 몽환적인 파도 소리에 흠뻑 젖어보시라. 

 

 

 

기자명 박상현 (블로거 http://landy.blog.me)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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