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야마토는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
  •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 호수 620
  • 승인 2019.08.0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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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해상자위대 군악대의 대민 행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시민을 상대로 하는 행사이니만큼, 영화음악이나 애니메이션 주제가 등 익숙한 곡들로 리스트를 채우는 것은 당연했을 터이다. 기왕이면 바다나 함선을 주제로 하는 작품의 OST를 연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 노래’를 연주하면 안 되었다.

1980년대에 MBC에서 방영한 일본 원작 애니메이션 중 <날으는 전함 V호>라는 작품이 있었다. 거대한 전함이 하늘로 떠올라 우주를 항해하는 이미지가 퍽 낭만적이었기에, 꽤 자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 <마징가 Z>의 파일럿 ‘쇠돌이’의 본명이 ‘카부토 코우지’임을 알게 되듯, 이 작품의 원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戰艦ヤマト)>.

해상자위대 군악대가 연주한 것은 바로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였다. 스토리 자체는 외려 반전과 평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편이다. 2199년, 지구가 외계인의 공격으로 환경 위기에 처하자 바닷속에 가라앉은 구 일본제국 해군의 배를 우주전함으로 개조해, 지구를 정화할 수 있는 장치를 찾으러 우주 먼 곳으로 떠난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 등장하는 함선이다. ‘야마토’가 어떤 배인가.

ⓒWikipedia1941년 일본 해군이 진수한 야마토 전함.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맹렬히 번져가던 1941년, 일본제국 해군은 미국에 비해 열세로 평가되던 해상 전력을 획기적으로 만회하려는 목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인 ‘야마토’와 ‘무사시’를 진수한다. 전장 263m, 전폭 39m.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중형 항공모함에 필적하는 덩치였다. 그리고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더 큰 전함을 만드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함의 시대가 야마토의 침몰과 함께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야마토가 바다로 나설 때는 전함의 시대가 이미 저물어가던 황혼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대구경 포를 장착한 거대한 전함은 지금의 핵무기와 맞먹는 존재였다. 이런 배를 몰고 가서 포탄을 퍼부어대는 것만큼 상대방을 확실하게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자연히 열강들은 너도나도 대형 전함 건조에 열을 올렸다. 이른바 ‘거함거포주의’ 시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며, 거함거포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한 척을 건조하는 데 나라의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의 돈을 들여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전함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전투기들이 바다 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장갑이 두꺼운 전함이라 해도, 위로부터의 공격에는 취약하기 마련이다. 전투기들을 갑판에 싣고 다니다가, 먼 거리에서 그들을 출격시켜 전함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태평양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제국의 위용을 온 바다에 떨치려던 야마토는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1945년 2월 미국 전투기들의 어뢰에 격침당하고 만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미국 전투기에 격침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 우리를 향해 들이대고 있는 무역 보복의 칼날이 거함거포주의의 황혼기에 바다로 향했던 야마토함에 겹쳐 보이는 것은 너무 나아간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시도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그들이 쥐여주는 돈 몇 푼에 입을 닥치던 이웃 꼬마가 아니다. 자신들이 길목 하나를 통제함으로써, 전 세계적 무역의 그물망을 어지럽혀보겠다는 심사는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지금도 야마토의 잔해는 북태평양 해저에 말없이 누워 있다. 지나간 시대의 영광에 연연해 무모한 짓을 벌이는 이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 일어나는 일을 온몸으로 웅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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