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의 도미
  •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호수 617
  • 승인 2019.08.0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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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도미가 큰 영향을 끼쳤다. 19세기 후반 도미를 잡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어부 탓에 분쟁이 일었다. 이후 도미는 일본인에게 필수 불가결한 물고기가 되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미다. 일본인이 일상적으로 먹는 물고기, 도미로 인해 이웃 국가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물고기가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이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가 대표적이다. 어부 출신 작가인 미국의 마크 쿨란스키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 훨씬 전부터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방의 어민들은 캐나다 서부에서 이미 대구 어업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한자동맹(유럽 내 도시들의 자유무역 공동체)이 유럽 내 청어와 함께 대구 어장을 독점하자, 바스크 어민들은 비밀리에 캐나다 뉴펀들랜드를 왕복하며 대구를 유럽 시장에 공급했다. 18세기 영국이 미국의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자, 식민지 미국인들은 이에 저항해 독립혁명을 일으켰다. 20세기 영국과 아이슬란드와의 어장 분쟁도 대구 때문에 일어났다. 쿨란스키의 말대로 ‘세계를 바꾼 물고기’였다.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바꾼 ‘대구’에 필적할 만한 해산물이 동아시아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중화요리점에 가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해삼’이다. 중국 요리의 역사만큼 해삼에 대한 중국인의 선호는 오래되었다.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 오스트레일리아 서부 해안, 일본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 북한의 함경도 연안까지 놀라운 생산·가공·유통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일본국립역사민속박물관

근대 전환기 제국으로 변모하던 일본에는 도미가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를 통해 유럽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처럼 강력한 쇄국주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이래 1867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1868년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메이지 유신이 추진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추진한 각종 근대적 개혁은 관습법에 따라 형성된 지역 공동체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은 어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에도 시대의 어장제도는 지역별로 각기 상이한 관습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1875년 기존 관습법을 부정하고 어장을 국유화하는 ‘해면관유선언(海面官有宣言)’이 선포되자 일본 어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특히 섬이 많아 어장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서일본 세토 내해 어민들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경제구조 변동은 어민들에게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쇄국정책 아래에서는 중국 수출 물량을 막부가 제한하고 있었지만, 막부가 붕괴되면서 어민들이 자유롭게 해산물을 팔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출입 자유화가 이루어지자 해삼·전복· 상어지느러미·다시마 등의 가공품이 자연스럽게 주요한 수출 상품이 되었다. 

이러한 해산물을 구하기 위해 일본 어민들은 조선으로 위험한 여행을 감행하게 된다. 흔히 ‘통어(通漁)’라 불린 일본 어민의 조선 진출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으로 전라·경상·강원·함경에서 일본 어민들의 어업 활동을 허용하면서다. 그러나 실제 월경 어업은 그보다 더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870년 오이타현의 어민들이 상어 어업을 위해 조선으로 넘어왔다. 당시 오이타현 어민들은 어획한 상어의 지느러미만 떼어 가공한 다음 중국에 수출하는 방법으로 큰 수입을 올렸다. 상어를 먹지 않기에 지느러미를 뗀 상어의 몸체는 바다에 버렸다.

당시 일본 어민들이 어획하고자 했던 해산물 가운데는 전복·해삼·상어지느러미 등 중국 수출용 이외에, 조선인과 비교해볼 때 일본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생선이 있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삼치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지만, 삼치는 조선에서 ‘망어(䰶魚)’라고 불리는 불길한 생선이었다. 

‘에비스 맥주’ 디자인에 등장하는 도미

물론 도미는 달랐다. 조선에서도 서울 근방에서 봄철 별미로 도미 맛을 즐기곤 했다. 도미는 남부 지방 장시에 자주 등장하는 상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와 달리 조선인에게는 삶의 주요한 시점에 없어서는 안 될 물고기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도미는 ‘백어(百魚)의 왕’으로 불리는, 가장 가치 있는 물고기로 여겨져왔다. 도미 양식 기술이 보편화되는 1960년대 전까지 일본에서 가장 비싼 생선이었다. 오래전부터 왕실 의례에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에도 시대엔 민간에서도 관혼상제에 빠질 수 없는 물고기였다. 도미는 특히 경사(慶事) 의식에 폭넓게 사용되었는데, 상류층 향연 요리를 기록한 <산내요리서> (1497)에도 사찰 요리로 문어·연어· 은어·농어와 함께 건도미 및 염장도미가 사용되고 있다. 

도미가 일본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이후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그 시대 들어서 도미 요리법이 다양해진 것과 관련된다. 에도 초기에 간행된 <요리물어>(1643)에는 도미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요리법도 가장 다양하다. 18세기 말 무렵 103가지 도미 요리를 소개하는 <조백진요리비밀상 (鯛百珍料理秘密箱)>이 간행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 일본에서는 ‘썩어도 도미’라는 말이 있었다.

ⓒ오창현 제공일본 도야마현에서 세시 행사 때 사용한 도안. 에비스가 도미를 들어 올리고 있다.

20세기 이후 일본의 민속자료를 보면, 도미가 일본인의 세시 의례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매년 정월이 되면 새우·귤·다시마·굴거리나무 등과 함께 건도미 두 마리를 꿰어 만든 ‘가케타이(懸鯛)’를 문 앞에 거는 관습이 있었다. 동해에 접한 혼슈의 시마네현에서는 정월에 고등어·삼치· 도미·오징어·무·곤포·감 등을 신전에 걸어두었다. 또 에히메의 오오미지마에서는 신단에 염장한 도미를 매달고 모내기 시기까지 두었다가 구워 먹으면 1년 내 건강하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가고시마에서는 정월 부엌의 삼나무 장대에 방어·도미·다시마를 걸었는데, 굴거리나무·종이·귤로 장식하고 끝에 무를 내려 달았다.

도미는 세시 의례뿐 아니라 일생 의례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혼례만 살펴보면, 신랑 측이 ‘가케타이’를 만들어 신부 집에 가져가 선물로 주는 관습이 서일본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널리 분포했다. 동북 지방인 이와테현에서는 혼인 잔치 때 신부 측의 손님 앞에 눈을 뺀 큰 도미 두 마리를 안주로 내주고 큰 잔으로 삼배주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규슈의 구마모토현에서는 혼약이 성립되면 남자 쪽의 부모와 친족이 중매인에 이끌려 여자 쪽으로 인사를 가는데, 이때 술·떡과 함께 도미를 들고 갔다. 사가현에서는 혼례 등의 축하 잔치를 시작하면 먼저 사람들에게 도미를 보여주고 나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주는 관행이 있었다.

이뿐 아니라 도미는 복을 가져다주는 일곱 신 중 하나인 에비스(恵比寿) 신앙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에비스 맥주 디자인에 등장하는 신이다. 낚싯대를 든 에비스가 도미를 안고 싱글벙글 즐거워하는 모습은 성격 좋은 부잣집 아저씨를 연상시킨다. 에비스는 일본 전역에서 가신(家神), 마을신, 해신(海神) 등의 형태로 모셔진다. 동일본에서는 상업신·어업신·농업신으로 각 가정에서 매우 폭넓게 모셔졌고, 서일본에서는 농업신보다는 어업신과 상업신으로 모셔졌다. 무로마치 시대 중반부터 서일본의 상인들은 일종의 동업조합인 ‘에비스코(恵比寿講)’를 조직하고 에비스를 신으로 섬겼다. 이러한 현상은 도미가 과거 일본의 다양한 집단에서 필수 불가결한 사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뿐 아니라 장난감, 음료 등 다양한 상품의 소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도미가 일본에서 이전보다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물고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산 도미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 오면서부터다.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각종 의례에 도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대 전후 조선에 넘어와 조업하던 일본 어부의 과반수가 도미 어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조선에 온 일본 어민은 ‘제국주의의 선구자’

도미를 필두로 일본인이 선호하거나 중국에 팔고자 했던 해산물을 찾아, 일본 어민은 신변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서 조업했다. 바다에서 어업을 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상륙해야 했는데, 총과 칼을 차고 조선 어민들을 해치기도 했고, 반대로 조선 어민들에게 상해를 입거나 살해당하기도 했다. 물론 양자가 부딪치면서 발생한 분쟁에 일본 정부나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는 일본 어민 단체가 개입했고, 분쟁 상황은 일본 어민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나아가 이러한 분쟁 자체가 일본이 제국주의 정책을 확장하는 데 주요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도미가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불씨였던 셈이다. 

당시 조선에 간 일본 어민을 두고 ‘자본제 경영의 시초’ 혹은 ‘제국주의의 선구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어민은 한반도를 장악한 뒤, 타이완과 중국 다롄과 칭다오까지 도미 어장을 확대해나갔다. 물론 도미 어장의 확대는 어민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의 팽창과 함께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결국 동아시아 각지에서 도미가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이전보다 더 많은 일본인이 과거보다 더 풍성하게 도미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도미 양식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 일본에서는 도미의 가격이 높지 않다. 지금 과거 도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고기는 참치다. 아직 완전 양식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가격이 높은 참치가 세계적인 물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 동북부, 유럽 지중해, 오스트레일리아 근해까지 일본인이 파견되어 방금 잡아 올린 참치의 상태를 관리하고 일본 도쿄의 쓰키지 시장으로 항공 직송한다. 쓰키지 시장에서 가격 등급이 매겨진 참치는 일본 전역의 어시장뿐 아니라 다시 전 세계 일식집에 판매된다.

이처럼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사물의 이면에는 일상성이 내재해 있다. 일상성은 일상적인 욕망이기에 큰 힘을 발휘한다. 물고기를 어획하는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가 인간사를 지배해온 것처럼, 내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어 필수 불가결하다고 간주되는 사물의 일상성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 거대 글로벌 기업이 존속할 수 있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일상이, 즉 먹고사는 게 다 비슷해지고 비슷비슷한 일상을 꿈꾸고 있는 현실과 매우 밀접히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적 일상성을 동질화하려는 거대한 힘 속에서도 약간씩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우리와 다른 세계를 살았던 이들의 ‘유산’ 혹은 ‘전통’이라고 부른다. 어제의 그들이 상상하며 만들어놓은  물질적 기반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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