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의 전화위복
  •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 호수 618
  • 승인 2019.07.26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성과 SK 등이 대규모 투자로 실리콘밸리 같은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관행에 따라 설계하면 반드시 망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역대 정부는 부품소재 산업의 국산화를 거듭 천명했다. 자동차 산업은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핵심 부품 90% 이상의 국산화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반도체 산업은 별 변화가 없다. 삼성의 설비투자 및 증산은 대일본 적자를 거의 같은 비율로 증가시킨다.

한국의 IT 산업과 일본의 부품소재 산업은 동아시아 고유의 장기 거래에 기초한 분업을 이뤘다. 장기 거래는 신뢰를 낳고 상대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므로 안정적이면서도 안성맞춤인 기술 발전도 일궈낸다. 하지만 이 관계가 쌍방 독점에 가까워지면 이른바 “근본적 전환”(경제학자인 올리버 윌리엄슨의 용어)이 일어나서 발목잡기 문제(hold up problem)가 발생한다. 이제 상대가 배반을 해도 응징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므로 일정 정도 이상의 특화를 초래하는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도 ‘죄수의 딜레마’에 속하며 해법은 수직통합, 또는 자체 생산이다.

마침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SK도 122조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용인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만일 이들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로 실리콘밸리 같은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일본이 일으킨 무역분쟁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기존 기업이나 대학교와 연구소의 입지, 연구 인력의 선호, 금융 등 지원서비스의 질 등 클러스터의 핵심 구성 요소 측면에서 수도권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수도권 규제와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목표 때문에 중앙정부는 이 지역의 혁신 클러스터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판교와 광교의 연구개발 중심 혁신 클러스터(테크노밸리)가 지방정부 주도형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기업 투자가 곧바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앞으로 경제적 의존이 정치적 압력의 빌미가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라면 한국 내부에서 핵심 부품과 소재를 생산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실리콘밸리의 재현은 각국 정부의 꿈이었지만 현실이 된 사례는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의 대부로 알려진 프레더릭 터먼 스탠퍼드 대학 교수도 미국 곳곳에서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예컨대 뉴저지 지역의 경우에는 저 유명한 벨 연구소가 주도했지만 기존 기업들 간 협력을 유도하지 못했고, 코넬 대학은 학술적 연구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삼성의 폐쇄적 네트워크, 연구기관 등에 개방되어야

한국의 카이스트 설립은 터먼의 실험 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과학기술부 산하에 최고 수준의 대학을 설립해 한국 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것이다. 공동학습을 통해 혁신을 이루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것(네트워크 외부성)이야말로 클러스터 성공의 핵심인데, 카이스트는 미국 거주 한국인 연구자를 유치하고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대한 대책 논의를 위해 7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2019.7.7


문제는 현재의 대기업이 과연 단기적인 이익 극대화를 넘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의 악명 높은 폐쇄적 네트워크가 연구기관과 중소기업에 개방되어야 한다. 휴렛팩커드와 인텔 등 실리콘밸리의 대기업은 공동의 장비 사용(삼성도 최근에 외부 기업이나 연구자에게 파운드리를 개방하기 시작했다)을 촉진하고 스타트업의 투자를 지원했다. 캘리포니아는 노동자의 이직에 따른 정보 유출에 관대한 법을 지니고 있으며 대기업은 스핀오프를 장려하기도 한다.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통한 생존 전략은 현재 재벌의 행동양식, 규범과 날카롭게 맞부딪친다. 단 20년 만에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규모와 네트워크의 질을 확보한 중국 중관촌(베이징)과 선전의 혁신 클러스터를 이제라도 따라잡지 못한다면 조만간 중국 기업에 추월당할지 모른다. 대기업이 관행에 따라 클러스터의 거버넌스를 설계하면 반드시 망한다. 정부가 인프라를 제공하고 대기업이 목표를 설정하되 대학이나 연구소, 중소기업들이 자신의 혁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