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하게 직조해낸 ‘판문점 핵 동결 드라마’
  • 남문희 기자
  • 호수 617
  • 승인 2019.07.1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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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 바깥 핵시설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은 이런 태도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도 당장은 핵 동결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 영변 지역 바깥에 우라늄 농축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북한은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이 문제는 실제로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최대 쟁점이었다. 영변 지역의 핵시설에만 국한해 협상하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영변 바깥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를 들이대며 압박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영변 바깥’의 존재조차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 회담은 결렬되기에 이른다.
ⓒ연합뉴스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30일 판문점에서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건너오고 있다.

이런 북한의 완강한 태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변 바깥의 우라늄 농축시설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미국과 협상 의제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는 변화가 감지된다.

영변 바깥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 가능성이야말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으로 촉발된 지난 6월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의 실질적 모멘텀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북한 움직임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최근 “판문점 회동 자체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에 의해 촉발됐지만, 그가 김 위원장을 만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은 북한 측과의 물밑 접촉 과정에서 하노이 회담의 결렬 원인이었던 영변 바깥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북측의 입장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국내 일부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중국 역할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지난 6월20~21일 방북한 중국 시진핑 주석의 최대 관심사 역시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북측의 입장 변화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 직접 소통하기를 원했다.” 시 주석은 6월29일부터 일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계속 가지고 있다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었다”라는 것이다.

하노이 때도 미국 입장은 ‘핵시설 동결’

북한이 미국과의 물밑 교감 속에서 협상의 최대 난점이던 영변 바깥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 소식통의 얘기는 미국의 대북 핵 동결 정책에 대한 6월30일자 <뉴욕타임스> 보도와도 맞물린다(20~21쪽 기사 참조). <뉴욕타임스>는 “판문점 회동 몇 주 전부터 트럼프 행정부에서 새로운 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북한에 대해 공식적 차원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핵 동결 정책으로 전환한다.”
ⓒ연합뉴스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돌아가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앞으로 북한과 협상하면서 비핵화를 전제로 하되 당장은 핵 동결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점은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의 보도로 다시금 확인됐다. <악시오스>는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이하 특별대표)가 6월30일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전용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즉,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목표로 하되 우선은 핵물질 생산 동결에 초점을 맞춰 로드맵을 짜고 있다. 또한 대북 제재 해제는 비핵화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 이전 단계에서는 연락사무소의 교환 설치와 인도적 지원, 인적교류 확대 등을 (핵 동결의) 대가로 제시한다.

6월30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는 트럼프 정부의 대북 핵 동결 정책이 마치 ‘새로운 구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 구상은 지난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이 제시한 방안 그대로다. 한국 내 일부 인사들이 당시 ‘북·미 간에 실무적으로 합의가 됐는데 뮬러 특검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앞세워 일부러 합의안을 깼다’며 협상 과정을 호도하는 과정에서 왜곡되었을 뿐이다. 당시에도 미국의 기본 입장은 영변 및 영변 바깥의 핵물질 생산시설 동결이었다(<시사IN> 제599호 ‘세기의 담판 이렇게 엇나갔다’ 기사 참조). 존 볼턴 보좌관이 등장해 핵·미사일은 물론 생물화학무기까지 포함하는 모든 WMD(대량살상무기)를 대상으로 빅딜을 주장한 것은 동결 협상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된 이후다.

그 뒤 한동안 존 볼턴식 주장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를 대변하는 듯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하노이 회담 당시의 핵 동결안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신호를 먼저 보낸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5월19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란 핵문제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하노이 회담을 거론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 당시 북한 내 핵시설 5곳 중 한두 곳만 없애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3곳은 어쩔 것이냐. 그건 좋지 않다. 합의를 하려면 진짜 합의를 하자고 했다”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의 비사를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 처지에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상황이 온 것이다. 사실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뿐 아니라 영변 바깥 시설에 대해서도 유연한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8일 북·중 정상회담 과정에서도 그런 태도를 드러냈다. 앞으로 북·미 정상회담이 재개되면 태천의 200㎿ 원자로 등 영변 지역 외 10여 군데 핵시설의 리스트를 미국에 제공하는 과감한 비핵화 계획을 중국 측과 협의했다는 정보가 입수된 바 있다(<시사IN> 제596호 ‘2차 회담의 중대 질문, 다 감수하시겠습니까’ 기사 참조).
ⓒ판문점 조선중앙통신판문점 자유의집에서 포즈를 취한 북·미 인사들. 왼쪽부터 리용호 북한 외무상,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당시 김영철 통일전선부(통전부) 부장이 이끄는 협상팀이 ‘영변 핵 폐기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라며 그릇된 정세 판단을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북측이 영변 바깥의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협상안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로 하노이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뒤 김 위원장의 낙담은 대단히 컸다. 잘못된 보고를 한 통전부 협상팀 대신 외무성 팀을 대미 협상 전면에 배치했다. 미국에 대해 ‘셈법을 바꾸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북한이 어려운 처지에 몰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원래의 하노이 협상안으로 회귀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폭스뉴스>에서 언급한 핵시설 5곳은 풍계리와 영변의 핵시설(플루토늄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 영변 바깥 태천의 200㎿ 원자로, 한·미 정보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황해북도와 평안북도의 우라늄 농축시설 등을 의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5곳 핵시설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존 볼턴식의 비현실적인 빅딜론에서 벗어나 비건 특별대표의 주장인 ‘동결-비핵화론’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강석주 띄우기’가 뜻하는 것
ⓒAP Photo2월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 회담을 끝내고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

북한의 대응은 6월10일자 <노동신문>을 통해 가시화됐다. <노동신문>이 느닷없이 1990년대 북·미 협상의 상징적 인물인 강석주 노동당 국제담당비서(1996년 식도암으로 사망)를 재조명하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다. “외교에서는 융통성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 당과 국가의 권위에 관련되는 문제에서는 어떤 융통성도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지난해 강석주 전 비서 직계인 한성렬 전 외무성 부상 처형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리수용 당 국제담당 비서가 장악한 북한 외무성에서는 그동안 ‘강석주 흔적 지우기’가 진행돼왔다. 대미 외교 황금기를 주도한 강석주를 다시 띄우고 “당과 국가의 권위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라면 융통성을 발휘해도 좋다”라고 해석될 수 있는 문구를 <노동신문>이 공개한 것이다.

그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아름다운 친서’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6월11일(현지 시각) “어제(6월10일)자로 받았다”라고 했으니 <노동신문>의 ‘강석주 띄우기’ 바로 다음 날이다. 김 위원장은 6월14일 트럼프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 형식으로 한 차례 더 친서를 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다시 6월16일 “어제(6월15일) 친서를 받았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가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졌다. 김 위원장은 이 친서를 시진핑 주석의 방북 일정(6월20~21일) 이틀 뒤인 6월23일 극적인 형식으로 공개했다. 김 위원장이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모습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하며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심각하고 중대하게) 생각해볼 것”이라는 발언이 <조선중앙통신>에 실렸다.

북·미 간 친서 외교는 전달 루트도 과거와 달랐다. 6월11일자 김 위원장 친서는 국무부가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통해 전달되었다. 6월23일 북한이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 친서는 뉴욕 채널이 아니라 미국의 고위 관료가 특사로 직접 들고 입북했다고 한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대치 국면 속에서 북·미 양국이 친서 외교라는 방식으로 접점을 모색한 것이다. 즉,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날리면 김 위원장이 호응할 수 있는 나름의 환경이 조성되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김정은 국무위원장이 6월20일 평양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을 맞이하고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는 모습이 6월23일 공개됐다.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북한과 미국이 물밑에서 활발하게 접촉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시 주석은 지난 1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 위원장이 영변 바깥의 핵시설에 대해 나름 유연한 입장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영변 바깥’이 향후 북·미 회담에서 핵심 쟁점임을 역시 모를 리 없다. 한 대북 소식통은 “시진핑 주석은 미리 관련 내용을 파악하고 싶어 했으나 김 위원장 주변 인사 중 시 주석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자고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전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 처형 이후 현재까지 북한 권력 내에는 ‘친중파’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북·중 접촉이 빈번한 상황에서 중국이 이른바 대국주의적 행태를 보인 까닭에 북한 권력 내부에는 중국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상태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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