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통공사에서 내가 일하는 병원과 제휴를 맺어 의료 정보를 소개하는 게시판을 지하철역사에 운영하고 있다. 산부인과 차례가 와서 주제를 고심하다가 임신 전 남성에게 어떤 관리가 필요한지를 정리했다. 나름 참신하고 시의적절한 작업이라고 뿌듯해하고 있는데, 공사에서 내용을 변경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지하철은 불특정 다수의 승객이 이용하는 만큼 보수적이거나 교육적인 면을 강조하는 승객들이 있으며, 민원 제기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남성이 임신 전 관리가 왜 필요하냐’라며 일선 직원들을 못살게 굴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고충이 이해는 갔다. 몇 차례 조율한 끝에 ‘임신 전 건강관리’로 여성과 남성을 위한 내용을 반씩 담아 최종 게시되었다.

임신이 되려면 남성과 여성의 몸, 생식호르몬, 환경 등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여성은 골반 초음파로 자궁·난소·질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혈액검사를 통해 빈혈·갑상선기능저하증 여부와 혈액형을 확인한다. 성매개 감염이나 간염 등 신생아에게 전염될 수 있거나 임신을 어렵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없는지 확인한다. HPV 백신, 풍진, B형 간염 예방접종도 미리 권고한다. 남성은 매독 등 성매개 감염 검사를 시행하며, B형 간염 예방접종을 권고한다. 위 검사에서 이상이 있을 경우, 교정 후 임신을 하는 것이 기형이나 조산 위험성을 줄이므로 최소 6개월 전부터 점검해야 한다.

ⓒ정켈 그림

여성과 남성 모두 스트레스가 가임력과 성욕을 낮춘다고 알려져 있다. 화학물질이나 중금속을 다루는 직업인 경우, 임신 시도 전 직장 환경이 자연임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안전관리지침 교육에 꼭 참가해야 한다. 본인의 생활습관을 재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다. 비만이면 과다한 지방조직이 성호르몬의 대사 작용에 문제를 일으켜 정자 생성을 방해하기도 하고(남성), 배란이 잘 안 되도록 하기도 한다(여성). 

또 당뇨·고혈압·고지혈증·협심증 같은 성인병은 정자 수 감소(남성), 임신 시 합병증 증가 (여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과음은 발기부전과 정자 수 감소(남성), 태아 기형(여성)의 주요 원인이 된다. 남성 흡연은 수정 능력의 30%까지 손상을 주며, 여성 흡연도 태아 기형, 조산, 저체중아 출산 위험성을 높인다. 간접흡연도 문제인데 남편의 흡연에 노출된 여성의 자연유산율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월등히 높다.

출산이 아닌 재생산 건강을 목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책임 아래 누구와 성관계를 할지, 언제 임신과 출산을 할지를, 또 여성이 임신 지속과 중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건강과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로 유엔에서는 ‘성과 재생산 건강권’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국가가 모성 건강관리, 피임 정보 및 서비스, 안전한 임신 중지 관리를 제공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은 계획임신을 하는 사람도 적지만 그렇다 해도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산전검진을 원해 산부인과를 찾으면 치료가 아닌 검진 목적이기 때문에 비급여라서 비싸고, 보건소에서도 지자체별로 지원하는 항목이 천차만별이다. 미혼이면 청첩장을 가지고 올 것을 요구하는 등 차별적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에 대한 환대는 사회가 함께해야 한다. 늘어나는 노인 인구를 위해 세금 낼 사람이 필요하다는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임신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임신 전 관리가 못마땅하다고 항의하지 않는 사회, 지하철 분홍색 좌석을 비워놓는 사회, 눈치 보지 않고 여성과 남성 모두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사회,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는 교육 환경, 그래서 ‘이런 사회에 아이들이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엽산 챙겨 드세요”라는 말밖에 못하고 있다.

기자명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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