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재해를 입으면 사람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누가, 혹은 내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천벌을 받을까. 옛사람이 사직단을 짓고, 노아의 방주나 바벨탑 따위의 얘기를 만들어낸 것은 그 때문이다. 문명을 초라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자연의 힘을 만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신에게 손을 내민다. 이는 지상의 숱한 교회와 사찰의 헌금함을 채워주는 힘이기도 하다.

전 세계 교회건 절이건 모두 통틀어 돈을 거둬들이는 데 가장 뛰어나다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천벌을 받았다’고 한마디 한 것은 시의 적절했다. 일본 사람이야 어찌 됐건, 국제 사회에서 욕이야 먹든 말든 자기 신자를 향해 ‘거봐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세냐’ 하며 단속한 것이다.

일반인이야 하늘 탓을 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경우에 가장 곤혹스러운 이가 과학자들이다. 학술지에 일본 동북부 지진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슈퍼 내추럴’ 의지가 작용한 결과라고 쓸 수야 없지 않은가.

자연재해 중에서도 과학자의 자존심을 가장 잔인하게 뭉개는 것이 지진이다. 국토가 지진대 위에 올라앉아 언제나 발밑이 불안한 미국과 일본은 부자 나라답게 그동안 원 없이 돈을 쏟아부었지만 지진 예보에 실패하고 말았다. 태풍과 슈퍼 문(Super Moon)이 언제 우리 코앞에 들이닥칠지는 분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맞히면서도 발밑에서 재깍거리는 시한폭탄을 어쩌지 못한다. 이번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뒤이은 쓰나미 역시 과학자의 예지력을 마음껏 비웃은 ‘거친 변이’였다. 

ⓒ한성원 그림
따지고 보면 인간은 지진이나 산불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기 짝이 없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 서방 연합군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게 될지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천안함 사건이나 9·11 테러, 멀리는 제1·2차 세계대전까지 누구 때문에, 혹은 왜 일어났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최근의 몇 차례 금융위기와 1930년대의 대공황이 왜 일어났는지도 분명치 않다. 수만 가지 세세한 이유를 댈 수는 있겠지만 전체 그림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엄청난 일들이 전조도 없이 벌어진다.

우리는 ‘임계상태’에 놓여 있다

한때 이과 전교 1등은 무조건 물리학과로 진학한다는 ‘아름다운 전통’이 한국에도 있었다. 그때 물리학과에 갔던 수재 중 상당수가 비정규직 연구원이 되어 동창회 때면 자기보다 한참 공부를 못했던 의사·변호사 친구에게 술을 얻어먹으면서 비감해한다는 슬픈 전설이 들려온다.

어쨌건 물리학이 학문의 제왕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이는 많지 않으리라. 물리학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처럼 한없이 복잡한 듯 보였던 일을 냅다 뒤통수 갈기듯 한 방에 정리해내는 힘을 지녔다. 사과를 가지에서 떨어뜨리는 힘과 하늘의 숱한 별을 움직이는 그 힘이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 〈뉴사이언티스트〉의 편집장을 지내고, 뛰어난 물리학자이기도 한 마크 뷰캐넌이 쓴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지호, 2004년)는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을 휩쓰는 불가해한 일들까지 물리학의 힘을 빌려 설명하려 한 과학자들의 성과를 기록한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가슴이 벅차 도중에 몇 차례나 책장을 덮고 마음을 가라앉혔던 기억이 난다. 우주의 비밀을 들춰본다는 느낌이었다.

모든 위대한 일의 동기가 반드시 거창하지는 않다. 1987년 퍼 백·차오 탕·커트 위펜젤트라는 세 물리학자가 뉴욕의 한 연구소에서 이상한 게임을 시작했다. 탁자 위에 모래알을 하나씩 던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한 것이다. 모래 산은 커지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며 요동쳤다. 이 요동을 이해하려고 세 사람은 컴퓨터를 이용했고 그들은 아주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수백만 번 실험을 했으나 전형적인 사태는 없었다. 어느 정도 모래 산이 커지면 모래알이 어떤 때는 한두 개, 어떤 때는 수백 개가 흘러내렸다. 뜻하지 않게 모래알 수백만 개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대격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리듬이나 규칙성이라곤 없었다. 다만 큰 격변은 작은 격변에 비해 일정한 비율로 적게 일어난다는 것, 즉 ‘멱함수’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세 사람은 도발적인 가능성을 제기했다. ‘임계상태’의 모래 언덕에서 일어나는 극도로 불안정한 일이 지구의 지각이나 산림, 또는 인간사에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임계상태란 숱한 변이가 일어나고 있어 언제나 격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물리학 용어이다.

지각이나 생태의 세세한 부분에 매달려온 지질학자나 생물학자들은 물리학자들의 이런 단순무식한 결론에 분개했다. 그들은, 현장을 싫어하고 엉덩이로 수학이나 계산하는 자들이라고 물리학자를 비난했지만 이어진 연구 성과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그동안 일어난 크고 작은 지진과 산불을 조사한 결과는 모래더미 실험과 놀랍게 유사했다. 어떤 때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가도 어떤 때는 악마처럼 돌변한다는 것과 그것을 관통하는 수학적 징표는 단순한 멱함수뿐이라는 것. 뷰캐넌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 파멸에 이를지 모르는 끔찍한 참사의 가장자리에서 사는 것이다.

1942년 12월2일 일군의 물리학자가 시카고 대학 임시 실험실에서 핵반응로 실험을 했다. 거대한 흑연 덩어리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긴 농축 우라늄 봉을 집어넣어 우라늄 핵을 중성자로 때렸다. 거의 핵폭발 직전까지 중성자 분열을 방치했다가 카드뮴 제어봉으로 통제했다. 그것이 인간이 처음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임계상태이다. 인간이 억지로 누른 임계상태를 초임계상태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시무시한 파국의 가장자리로 자기 자신을 몰아넣는 행위이다.

초임계상태를 설명하려고 뷰캐넌은 1988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산불을 예로 들었다. 이 산불은 광기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기이한 행태와 속도로 퍼져나갔다. 나중에 연구자들은 여기에 옐로스톤 효과란 이름을 붙였는데 원인은 단순했다. 1890년 이후 미국 산림국은 산불을 단 한 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숲은 자연적인 임계상태에서 벗어나 초임계상태로 들어갔다. 대자연은 숲속에 최후의 심판을 준비한 것이다.

요즘 미국 산림국은 숲에 산불을 돌려준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작은 산불은 그냥 놔둔다. 남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강 관리자들이 홍수를 강에게 돌려주자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핵반응로의 직계 자손인 후쿠시마 제1원전 3호기 상공에 산불 진압용 헬기가 뜬 것은 말 그대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경고가 옳을지 모르지만

 1997년 베를린의 두 연구자는 미국의 2400개 도시를 조사했는데, 매우 흥미로운 규칙성을 발견했다. 큰 도시 하나 주변에 인구가 절반인 도시 네 개가 있는 기하학적 꼴이 인구 10만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모든 도시들은 숱한 개인의 의지와 천만 가지 이유로 이루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순한 수학 법칙을 따랐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범위를 넓혀도 똑같은 기하학꼴을 발견할 수 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과 금융위기를 모두 조사해도 마찬가지였다. 모래더미·지진·산불과 똑같이 매우 단순한 수학법칙을 따를 뿐이다.

뷰캐넌이 소개한 이 복잡계 물리학에 대한 비판은 아직 많다. 물리학을 섣불리 인간사에 대입하지 말라는 아인슈타인의 경고가 옳은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주의 생명과 진화의 비밀이 적을 향해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흰 코뿔소의 잿빛 눈빛과 같은 임계상태에 있다는 뷰캐넌의 설명이 원죄론이나 천벌론보다는 훨씬 매력적이다. 만약 복잡한 우주와 인간사, 그리고 나도 모를 나를 이해할 열쇠를 찾은 것이라면 이는 정말 가슴 뛰는 일이 아니겠는가.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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