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 시작 15분 전부터 법정이 분주했다. 피고 쪽 변호인단이 프레젠테이션 예행연습을 했다. 노트북을 꺼내고 테스트를 했다. 변호사가 4명이나 법정에 나와 변호인석이 부족할 정도였다. 법정 경위가 변호사 대기석 책상까지 옮겨 변호인석 옆으로 붙여준 뒤에야 4명이 모두 앉을 수 있었다. 변호인단 맞은편에 비친 프레젠테이션 바탕화면에는 삼성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11월25일 오후 3시30분 서울행정법원 203호.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이 시작되었다. 원고는 이른바 삼성 백혈병 피해자들이다. 2007년 삼성전자에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등 피해자 6명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2009년 5월 모두 직업병이 아니라며 산재 승인을 거부했다. 지난 1월11일 황씨 등은 행정법원에 산재를 인정해달라며 행정소송을 냈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 변론 준비 기일을 거쳐 10개월 만에 정식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시사IN 안희태7월12일 삼성전자의 산업재해 은폐 의혹을 규탄하는 증언 대회에서 참가자가 눈물을 닦고 있다.

이번 소송은 근로복지공단이 피고이지만, 삼성전자는 법무법인 율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했다. 자격은 ‘보조 참가인’이지만 이날 법정에 나온 변호인단은 모두 율촌 소속으로 삼성은 ‘피고’나 다름없었다.

이날 법정에는 소송을 낸 황상기씨, 남편 황민웅씨를 잃은 정애정씨가 방청석에 앉았다. 현재 백혈병을 앓고 있는 송창호씨도 방청했다. 삼성 백혈병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와 공유정옥 산업전문의 등도 참관했다. 삼성전자 직원들까지 방청하면서 100석 가까이 되는 방청석에 빈자리가 없었다.

반도체 공정 물질 10종은 성분조차 몰라

원고 쪽 변호인으로는 박상훈·박영만 변호사 두 명이 나와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법무법인 화우 소속 박상훈 변호사는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노동 전문 변호사이다. 2008년 ‘불법 파견도 2년 이상이면 직접 고용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박 변호사는 “누군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서 공익소송 차원에서 맡았다”라고 말했다. 박영만 변호사는 지난 2005년까지 산업의학과 전문의였다. 의학박사 출신의 산재 관련 전문 변호사이다.  

원고 쪽 변호인단은 피해자들이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 국제암연구소가 발암물질로 분류한 벤젠과 산화에틸렌 등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백혈병 논란이 계속되자 노동부 권고에 따라 삼성, 하이닉스, 엠코 코리아 등 반도체 3사가 공동으로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이하 ‘서울대 역학조사’)을 주요 근거로 제시했다. 서울대 역학조사에서 삼성이 쓰는 40~ 50여 개 감광제 중 6개를 분석한 결과 쓰지 않는다고 공언한 벤젠이 검출되어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삼성은 그동안 영업 비밀이라며 이 보고서의 공개를 거부해왔다. 이번 재판 과정에서도 원고 쪽 변호인은 이 보고서 전체를 확보하지 못했다. 삼성의 반발로 재판부는 그 일부만 원고 쪽 변호인에게 공개를 허용했다.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 중인 화학물질의 개별 종류는 83종인데 작업환경 측정을 하는 물질은 24종(28.9%)에 불과했다. 특히 10종은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 자료조차 확인이 안 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원고 변호인단은 소송을 제기한 6명 외에도, 백혈병이나 악성 빈혈을 앓고 있는 35명의 명단을 제시했다. 변호인단은 의학 교과서에도 백혈병은 인구 10만명당 3.6명, 65세 이하에서는 1.7명밖에 발생하지 않는 희귀질환임을 강조했다. 끝으로 원고 쪽은 ‘업무와 재해 사이 인과관계가 의학적·자연적으로 명백히 입증되지 않더라도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推斷)되는 경우 입증이 된다’는 판례를 들었다. 또 법적 노출 허용기준을 초과하지 않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벤젠에 노출되었을 경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례 등도 조목조목 제시했다.

ⓒ삼성전자 제공삼성전자는 백혈병 논란이 일자 지난 4월 이례적으로 기자들에게 반도체 공정을 공개했다.

40분간 원고 쪽 변호인단의 변론이 끝나자, 삼성전자를 대리한 피고 쪽 변호인단은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먼저 원고에게 유감을 표시했다. 율촌 소속 곽희경 변호사는 “열심히 근무한 근로자가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삼성은 고통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삼성 측 “서울대 역학조사에 오류 가능성”

피고 쪽 변호인단은 황유미씨 등이 근무한 라인에서는 백혈병 원인 물질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동영상까지 준비해 원고 노동자들이 클린룸에서 어떤 작업을 했는지를 직접 보여주었다. 변호인단은 황유미씨가 진행했다는 식각(etching) 공정을 설명하며 미리 준비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동영상에는 ‘자동화’된 작업 장면이 비쳤다. 그 순간 방청석이 술렁였다. 공유정옥 산업전문의는 “말도 안 된다”라고 중얼거렸다. 방청석 맨 뒤에 앉아 있던 황상기씨는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법정 경위가 황씨를 제지했다. 고 황유미씨가 근무한 3라인은 가장 노후한 시설로 이른바 ‘퐁당퐁당 라인’이라 불리는 수동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방청석이 웅성거리자 재판부도 “현재 시설을 보여주는 것이냐?”라고 변호인에게 물었다. 변호사는 “그렇다”라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그 뒤 원고 쪽이 주장한 퐁당퐁당 라인도 백혈병과는 무관하다며 당시 공정을 재연한 장면도 보여주었다.

피고 쪽은 백혈병 유발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를 주요 근거로 삼았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과 배치된 조사 결과를 내놓은 서울대 역학조사 결과는 부인했다. 피고 쪽 변호인단은 “한국화학연구원·한국산업기술시험원·외국의 발라즈(BALAZS) 연구소 등에 서울대 조사 때 벤젠이 나왔다는 감광제 검사를 의뢰했는데, 모두 벤젠이 함유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서울대 조사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피고 쪽 변호인단은 “삼성이 쓰지도 않은 화학물질에 원고들이 노출되었다는 원고 변호인단의 주장은 연금술사적인 가정일 뿐이다. 이 사건은 질병과 업무상 관련이 없다”라고 끝맺었다. 피고 쪽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방청석 맨 뒤에 있던 황상기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발언권을 얻은 황씨는 “조금 전에 삼성 쪽이 보여준 화면은 당시 근무 환경이 아니다. 최신 설비를 보여주면서 호도했다”라고 말했다.

첫 법정 공방은 예상 시간을 넘겨 진행되었다. 이날 재판부는 변호인 쪽 증인 신청을 모두 받아들였다. 삼성전자 근무자뿐 아니라 서울대 역학조사를 진행한 백도명 교수와 반올림 소속 공유정옥 산업전문의, 김현주 단국대 교수 등을 모두 증인으로 채택했다.

공판이 끝나자 법정 밖으로 나온 황상기씨는 “삼성 쪽 변호인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난다”라고 말했다. 11년간 삼성전자에 근무한 정애정씨는 “변호인이 보여준 작업공정은 모범 매뉴얼 그대로이다. 저렇게 근무했다면 왜 내 남편이 백혈병으로 숨졌겠는가”라고 말했다. 다음 공판은 12월27일에 열린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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