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에 살고 있는 앨리다 에르난데스 씨(사진·80) 집 거실에는 유독 사진이 많았다. 그녀의 부모에서부터 증손자까지 4대에 걸친 ‘빅 패밀리’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14년간 ‘빅 블루 패밀리’ 일원이었다. 지난 1991년 IBM을 퇴사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993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도 의사가 ‘사망 선고’를 내린 순간을 잊지 못했다. “의사가 내게 암을 선고했을 때, 1주일 혹은 2주일 아니면 1년…,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숨겼지만 소송이 보도되면서 자녀들도 이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1995년 암이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전이되지도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비록 가슴을 잃었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수술만 받고 항암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았는데 거의 완치되었다. 가족의 지지가 병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완치되다시피 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회사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회사는 화학물질 독성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내가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다.”

ⓒ반올림 제공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에 살고 있는 앨리다 에르난데스 씨
그녀가 IBM이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소송까지 결심한 것은 진실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덕이다. “나는 진실을 위해 싸웠다. 반도체 산업의 비밀 일부를 벗겨내 후손들이 같은 고통을 겪지 않게 한 게 가장 자랑스럽다. 다른 사람들도 내 싸움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동료들은 내게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불행은 자녀들에게 대물림되었다. 남미계 이주민 출신이라 그녀의 자녀·손자·손녀들도 인텔 등 반도체 산업에 종사했다. “내 손자는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했고, 손자의 장모는 인텔에서 일했는데, 내 증손녀가 선천성 암을 가지고 태어나 세 살 때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손자나 증손자들에게 늘 강조한다. “너희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쓰게 되더라도 절대로 물어보길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하고 해석해 알려달라고 회사에 요구해라.”

그녀는 삼성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했다. “두려워 마세요. 당신들에게는 알권리가 있습니다. 회사에게 물어보세요.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도 그녀는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당신이 직접 클린룸에서 일해보든지, 노동자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보라.”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