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제주올레’ 짝퉁이려니 했다. 제주올레의 기록적인 성공 이후 온 나라 구석구석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걷는 길의 아류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그 길을 만드는 데 앞장선 이가 소설가 이순원씨(사진)라는 얘기를 듣고 ‘어라’ 싶었다. 이순원씨가 누구인가. 눈 내리는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신비롭고도 쓸쓸한 연애소설 〈은비령〉으로 기어이 실제 지명까지 바꾸게 만든 바로 그 감자바우 대표 작가 아니던가(‘은비령’은 본시 인제 필례약수 인근을 염두에 둔 가상 지명이었다). 그런 작가가 만든 길이라니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 길 ‘바우길’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들을 기회를 가진 것은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을 만났을 때였다. 서 이사장은 “강원도에 정말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더라”며 바우길 얘기를 꺼냈다. 이순원씨와 그 친구들이 관의 도움도 거의 없이, 오직 발품과 인내로 불과 10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무려 150km에 이르는 길을 냈더라는 것이었다. 불현듯 바우길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길이기에 저런 관심을 받는 걸까. 그보다 열 달 동안 150km 길을 낸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이런저런 의문들을 두서없이 떠안은 채 이순원씨를 만났다. 바우길로 떠나기 전 서울 인사동에서였다.

ⓒ시사IN 조남진소설가 이순원씨는 고향인 강원도에 바우길을 만들었다.
본래 걷는 걸 즐겼나? 걷는 길을 만든다니까 많은 분이 오해를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해 바우길을 만들면서 등산화라는 걸 처음 샀다. 그전에도 산에 제대로 올라본 적이 없다. 문인들이 본래 그렇지 않나. 산에 가도 입구에서 한 잔 두 잔 하다보면 하루해가 가는 거지(웃음).

그런데 어떻게 바우길을 만들게 됐나? 내가 15년 전,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과 대관령 옛길을 걸어 내려온 뒤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소설을 쓴 일이 있다. 그 뒤로 고향인 강원도에 걷는 길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종종 받았다. 그때는 다 흘려들었다. 제주올레 다녀온 사람들이 다들 한마디씩 해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고향 사람들을 만났는데, 누군가 “우리에게도 길에 이야기를 담아 생명력을 불어넣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얘기하더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아, 작가인 내가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 과거의 길이 기억에 남아 있던가? 서울에서 산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난 지금도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일기예보를 보면 강원도 것부터 본다. 오히려 일산 생활이 타관 생활 같다(그는 현재 경기도 일산에 산다). 부모님이 아직 고향에 계셔서 그럴지 모른다. 내 작품도 대부분 고향에서 자라며 보고 들은 것들을 글로 옮긴 것이다. 그렇지만 길을 찾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탐사대장 역할을 해준 이기호씨(산악인) 도움이 컸다. 나는 그이를 ‘고산자 김정호 같은 사람’이라 부르곤 하는데 과장이 아니다. 늦가을 울창한 산에서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미로 같은 반대편 산을 바라보며 “저기 길이 있겠다”라고 해, 가서 확인해보면 어김없이 길이 있었다.

ⓒ시사IN 백승기이순원씨가 낸 바우길
짧은 기간 무려 150km에 이르는 길을 낸 비결이 무엇인가? 사실 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지금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 묻혀 있는 길을 찾아내 이어주었을 뿐이다. 강원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강원도는 워낙 지형이 험하다보니 산길을 피해 버스·택시 다니는 길이 따로 났다. 덕분에 마을과 마을을 잇는 여벌의 옛길들이 살아남았다. 강릉 시내나 바닷가 쪽에도 알려지지 않은 좋은 산책로가 예상 외로 많았다. 최근 몇 년간 지자체가 돈 들여 정비한 건데 어떤 길은 이용하는 사람이 일 년에 열 명이 채 안 된다고 했다. 이런 길들을 일일이 답사해 이었다. “주말마다 길을 나섰다”라는 말이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지난해 8월 이후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강원도를 찾았다. 주중에는 일산에서 소설을 쓰고 주말에는 고향에 가서 길을 걸었다(올해 초 그는 바우길 탐사와 병행하며 쓴 소설 〈워낭〉을 발표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150km가 넘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 본래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빠른 속도를 거부하는 것일 텐데.
사실은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길을 내면서 새로 공부한 게 많다. 그전까지는 글을 쓰기에 내가 세상에 대해 꽤 많이 안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이면이 있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을 내면서 그는 ‘길을 팔아먹으려는 자들’과 정면충돌하게 됐다고 했다. 처음에는 바우길 탐사를 함께하던 이들이었다. 이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유사 바우길을 만들었다. 바우길과 겹치는 코스에 자기네가 명명한 새 길 이름을 달고, 이 길을 지원해달라는 신청서를 지자체에 제출했다. 그는 이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라고 말했다.

길을 팔아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들은 길을 만든다며 조경업체를 통해 예산 견적부터 뽑으려 들었다. 길을 내는데 왜 돈이 필요한가.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길 곳곳에 나무 계단을 만들고, 벤치·전망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 게 왜 필요한가. 걷는 건 기본적으로 지루하고 불편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몸이 살아나고 생각 또한 깊어진다. 후배가 그러더라. 오래 걷는 것은 의지의 인내력뿐 아니라 사고의 인내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고. 그런데 길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개인의 경제를 위해서라면 길 위에 쓸데없는 공사판을 벌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듯했다. 신문 칼럼에 지방 토호세력을 비판한 글을 쓴 걸 봤다. 이 일 때문이었던 건가? 솔직히 언론 플레이 좀 했다(웃음). 그렇게 해서라도 강하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이건 바우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주올레 성공 이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걷는 길’ 만들기에 뛰어들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돈의 논리로 길에 접근한다. 1km 길을 내는 데 3000만원쯤 든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마인드로는 걷는 길이 오히려 난개발을 부채질할 수 있다. 인간 친화적으로 길을 내겠다는 지자체에 ‘인간 친화적인 게 어떤 길이냐’고 물으면 대뜸 ‘그러니까 나무 계단 만들어 관광객들이 편히 걷게 해주고…’ 하는 식으로 나온다. 끔찍하다. 바우길은 원칙이 분명하다. 아무리 지름길이라도 사람이 농사짓는 논둑길은 돌아가고, 빼어난 길이라고 욕심내지 말고, 없던 길은 새로 내지 말자는 거다. 그런 다툼에 휘말리는 게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작가로 우아하게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고향의 부모님과 친척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 더러운 놈들과 싸우지 말고 그냥 나오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본래 국책 금융기관에 다니다 글 쓰는 길을 택했다. 뜻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글’에서 ‘길’로 갔을 때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었던 것으로 봐주시면 된다. 이게 내가 할 일이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후손들에게 빌려 쓰는 땅에 공사장비가 들어오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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