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인숙의 자전소설 〈해삼의 맛〉에서, 소설 같은 삶을 사는 사내가 이제 막 소설을 써보려는 여학생과 해삼을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이렇게 말한다. “소설이란 건 말이지, 이 해삼처럼, 있는 힘을 다해 딱딱 씹어 삼키는 거라 이그요. 이 해삼처럼….” 소설을 쓰는 자에게도, 읽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해삼을 씹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써낸 한국 소설이 최근 몇 달 새 쏟아졌다. 춥고 긴 겨울을 지내고 만나서인지 소설들은 한층 더 단단하고 푸릇하다. 유명한 작가도 신작을 내고 갓 등단한 작가도 첫 책을 냈다. 이제 독자가 딱딱 씹어 삼킬 차례다.     

■이번에는 어떤 맛일까
박범신·윤대녕·성석제·한강처럼 이미 이름을 알린 작가들이 프로필에 소설책 한 권을 더했다. 역시 사랑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결이 모두 다르다. 박범신의 〈은교〉(문학동네)에는 17세 소녀를 사랑한 늙은 유명 작가와 글을 못 써 스승에게 경멸받는 그의 제자가 등장한다. 읽어갈수록 소녀와 노인의 사랑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애증이 선연히 드러나, 노인의 유서 마지막 문장처럼, 소설은 매우 “관능적이다”.

윤대녕의 단편소설집 〈대설주의보〉(문학동네)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은 주로 유부남과 유부녀이다. 그들은 백담사와 지방의 온천, 강구항, 풀밭 위 같은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오래 기다리거나 짧게 만난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에서도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작가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화가 한은선·김명숙, 조각가 윤석남의 작업물을 보고 소설에 그 이미지를 녹였다. 그래서 〈바람이 분다, 가라〉는 전작 〈채식주의자〉처럼 회화적이다.

‘운동권 작가’로 분류되던 소설가 정도상은 이번에는 전혀 다른 작품을 냈다. 2005년 열다섯 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들의 3년상을 치르고 나서 쓰기 시작한 소설, 〈낙타〉(문학동네)이다. 생전 입시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고민하던 아들에게 “흉노족의 암각화를 보러 가자”라고 한 약속을, 작가는 소설 〈낙타〉에서 지켰다. 

소설가 성석제는 〈인간적이다〉(하늘연못) 안에 짧은 이야기 마흔아홉 편을 실었다. 무료해서 밤송이의 가시를 세는 사냥꾼과 돈이 모자라 담뱃값을 깎는 청년 이야기처럼,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을 담았다. 작가는 이런 장면들을 “살면서 만나는 소설의 작은 기미”라고 말했다.

원로·중견 작가들을 한꺼번에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현대문학이 55주년을 기념해 낸 소설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가 맞춤하다. 박완서·이동하·윤후명·김채원·양귀자·최수철·김인숙·박성원·조경란 등 한국 대표 작가 9명이 자신의 삶과 소설에 대한 고백을 풀어놓은 책이다.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문학’ 자서전이다. 왜 소설을 쓰고, 어떤 소설을 쓰려 했으며, 소설을 쓸 때 어떤 고통을 겪는지가 소설로 표현돼 있다.

ⓒ시사IN 안희태
■젊은 감수성으로 소설의 맛을 살리다
살면서 자기 이름으로 처음 소설책을 내는 작가들은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각각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과 제6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문진영, 창비)과 〈컨설턴트〉(임성순, 은행나무)에는 작가가 속한 ‘세대’를 이야기했다. 1987년생 작가 문진영은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 외에 주체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지금 20대를, 1977년생 작가 임성순은 ‘구조조정이란 단어에 늘 생존본능이 자극되는’ 한때의 엑스 세대를 그 세대만이 포착할 수 있는 감수성으로 그려냈다.

단편소설집 가운데에는 새로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이 많다. 장편소설 〈무중력 증후군〉으로 상상력을 검증받은 작가 윤고은이 낸 첫 소설집 〈1인용 식탁〉(문학과지성사)에는 혼자 식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과 백화점 화장실에 붙어 있는 휴게실에서 소설을 쓰는 무명 작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대신 꿈을 꿔주는 철학관처럼 엉뚱한 소재들이 등장해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역시 첫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낸 김이설은 제목처럼 ‘아무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어둡고 습한 이야기를 즐겨 짓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는 역 안 ‘삼촌’들과 잠자리를 하며 받은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킹을 사는 열세 살 노숙인 소녀(〈열세 살〉)와 돈을 받고 10개월간 자궁을 빌려주는 대리모 여대생과 그를 돌보는 의뢰녀(〈엄마들〉), 엄마에게 버려진 후 고속도로 갓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를 아빠라 부르며 그의 아이를 낳는 소녀(〈순애보〉)가 등장한다.

한창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의 면면을 살피고 싶다면 〈201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이 좋다. 심사위원들이 지난해 발표된 단편소설 가운데 2000년 이후 등단한 작가의 작품 190편을 심사한 결과, 김중혁·편혜영·이장욱·배명훈·김미월·정소월·김성중의 작품이 꼽혔다. “작품들을 한 성향으로 묶어낼 수 없는 다양성의 발견(신경숙)”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기쁨이다.

그 외 실험적인 서사가 돋보이는 김태용 작가의 첫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자음과 모음)와 ‘실종’이라는 모티프가 반복되는 한지혜의 두 번째 소설집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실천문학사), 평론가로서 이미 입지를 굳힌 이장욱의 첫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이 있다. 젊은 작가 11명이 참여해 ‘고양이’를 소재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테마 소설집 〈캣캣캣〉(현대문학)도 흥미로운 책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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