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이 지면의 ‘주인공’으로 주꾸미를 생각했다. “서해안 주꾸미는 4~5월이 가장 맛있다”라는 충남 서천 출신의 친구 말을 듣고서 탱글탱글한 주꾸미 살맛을 소개할 참이었다. 한데 ‘이미 축제가 끝나서…’라는 이야기에 김이 빠졌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두족류(頭足類)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터라, 얼른 남쪽 해산물로 관심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 결과 제2 후보로 떠오른 바다 생물이 어패류(새조개와 피조개)와 멸치였다.

어느 놈이 봄에 더 살이 오르나 궁금해서 남해군청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두말이 필요 없었다. ‘멸치’였다. 친절한 공무원은 “지금이 제철이라서 실컷 보고 먹을 수 있다”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멸치처럼 남해군으로 내달렸다. 삼천포에서 남해로 건너가는 창선대교에서 내려다보이는 크고 작은 섬에는 온통 오색 꽃밭이었다. 하지만 꽃구경은 뒷전이었다.

ⓒ시사IN 백승기남해산 멸치라서 더 싱싱하고 맛있는 멸치회와 멸치구이 그리고 멸치쌈밥.

멸치라고는 볶음멸치와 국 멸치 그리고 지난해 제주도에서 처음 접한 멜국(생멸치와 배추 줄거리를 넣고 끓인 토장국) 속의 손가락만한 생멸치밖에 못 먹어봤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일단, 멸치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죽방멸치부터 접해봐야 멸치 운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서 찾아간 곳이 삼동면 지족리였다. 과연, 소문대로 긴 다리(창선교) 아래 해협으로 누런 바닷물이 빠르게 흘러다녔고, 그 속에 V자형 죽방염(竹防簾)들이 우뚝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마침 쪽배 몇 척이 죽방염에 다가가 작업 중이어서 그 꼬소하다는 죽방멸치를 생으로 맛보나 싶었다. 물살이 빠르고 얕은 해역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친 덕에 지방은 적고 육질이 더 쫄깃하고 고소하다 했던가. 그런데 물가에 서서 작업을 지켜보는 김희두 지족2리 어촌계장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니나 다를까 입에서 남해군청 공무원의 설명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요즘은 거의 안 잡힌다. 5월이 중순이나 되어야 제대로 나온다.”

차근차근 들어보니 25개 죽방염을 놀리는 건 아니었다. 하루 두 번(낮 두세 시, 밤 두세 시) 썰물 때에 죽방염 임자들이 나가 고기를 뜨기는 뜬다. 그런데 요즘 뜰채 안에서는 멸치대신 주로 놀레미·전어·도다리 따위가 펄떡인단다. 그렇다면 5월 장미꽃 필 무렵에 건너오면 제대로 맛볼 수 있을까. “당연하다. 많이 잡히면 하루 최고 40~50바구니(30kg 기준)씩 잡는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1.5kg에 20만~40만 원을 호가하는 죽방멸치 금이 그 즈음에는 좀 낮아진다고 하니, 미련과 기대를 번갈아 꺼내보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시사IN 백승기미조항에는 멸치잡이 어선이 40여 척이나 남아 있다. 어부들이 방파제 부근에서 잡아온 멸치를 그물에서 떨어내고 있다.

서둘러 먼 길을 달려오느라 홀쭉해진 배를 채우려, 다시 군청 문화관광과에 물었다. “멸치 요리 잘하는 집 좀 소개….”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건너오는 명쾌한 대답. “삼동면사무소 앞 우리식당 가보소!” 어라, 바로 코앞이었다. 소문난 맛집인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사람이 왁자지껄했다.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멸치쌈밥, 멸치구이, 멸치 회를 주문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음식들이서인지, 자연스레 입에 군침이 고이며 코가 벌렁거렸다.

가장 먼저 상위에 올라온 요리는 멸치 회. 숭숭 썬 양파·미나리·깻잎·청양고추와 싱싱한 멸치 살점을 버무려냈는데, 시뻘건 때깔부터 입맛을 당겼다. 멸치 회 두 점을 야채와 씹어보았다. 젤리처럼 부드러운 회와 아삭아삭한 야채가 조화롭게 씹혔다. 천천히 입속을 채우는 새콤달콤한 풍미와 고소한 뒷맛. 청양고추 탓에 뒤끝이 홧홧했지만, 회를 두어 점 더 곱씹자 금세 꼬소한 맛이 입을 지배했다. 멸치 회를 막걸리로 씻어 무친 덕인지 비린내도 전혀 나지 않았다. 주인이 권한 대로 통마늘이 12%나 들어갔다는 남해산 ‘마늘 탁주’ 한 모금을 들이켜자, 단맛이 한바탕 더 맴돌았다. 신기했다. 두 번, 세 번… 곱씹을수록 멸치의 고소함이 더 진해졌다.

ⓒ남해군청 제공죽방렴은 V자형 안쪽으로 멸치 떼가 들어오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노릇노릇한 생멸치구이는 회와 느낌부터 달랐다. 통째로 보니, 멸치의 ‘짧은 일생’이 떠오른 것이다. 상어와 고래의 큰 입을 피해 바다를 헤엄치고, 거친 해일과 파도를 거슬러 오르던 날래고 예리한 몸짓. 그 멋진 은빛 멸치를 온새미로 입에 넣자, 마치 바다를 통째 먹는 듯했다. 맛은 꽁치보다 더 준득하고 담백 고소했다. 다른 데서는 양념장을 끼얹어 내놓기도 한다는데, 가는 소금만으로 간을 해서 더 고소한지도 몰랐다. 어느 작가가 청와대에 ‘진상’된 남녘 김을 먹어보고는 ‘내가 이제껏 먹은 김은 김이 아니라 종이였다’고 했다더니, 내게 남해 멸치가 그런 자각을 일깨웠다.

매콤칼칼하게 조린 통멸치를 쌈사먹는 멸치쌈밥은 더 독특한 맛이었다. 상추에 밥·마늘장아찌·쌈장을 포갠 뒤 그 위에 통멸치를 올리고 몇 입 우물거리자, 각 재료가 지닌 특유의 맛과 향이 고소한 멸치와 잘 어울렸다. 고구마줄기와 무청을 넣어 바특하게 졸인 국물은 칼칼하고 구수해서 밥 비벼먹기 딱 좋았다. 맛있는 식당은 밑반찬부터 다른데, 파래 무침·깻잎 조림·멸치젓·갓김치·마른 죽방멸치 같은 반찬도 밥도둑이었다. 결국 밥 한 공기로 끝내지 못하고 주방을 향해 “여기 밥 한 공기 추가요!” 하고 외치고 말았다.

ⓒ시사IN 백승기남해는 자칭 타칭 ‘보물섬’으로 불린다. 곳곳에 다랭이논(위)·금모래 해안 같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손님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34년간 멸치를 만져온 주인 이순심씨(64)가 다가왔다. 배 두드리며 궁금한 것 몇 가지를 물었다. “어디 멸치를 쓰는지?” “인근 죽방멸치.” “멸치 요리와 제일 잘 어울리는 술은?” “탁주, 막걸리.” “멸치 요리는 언제가 제일 고소한지?” “사월초파일(5월21) 전후.” 식당을 나서는데 이씨가 ‘안 오면 당신이 손해’라는 투로 말했다. “5월 중순 이후에 잡히는 멸치가 제일 맛있으니, 그때 꼭 한 번 더 오이소.”

다음 목적지는 남해군에서 가장 멸치를 많이 잡는다는 미조항. 바다가 연신 ‘흰 이빨’을 으르렁거려서인지, 많은 배가 묶여 있었다. 최갑용 미조수협 계장에 따르면, 미조항의 멸치잡이 배는 40여 척. 정치망 어선이 30척, 유자망 어선이 10여 척이다. 정치망은 멸치를 둥그렇게 몰아서 잡고, 유자망은 흐르는 물살 가운데에 너비 11m, 길이 2000여m짜리 그물을 쳐서 지나가는 멸치 떼를 포획한다(그물코 크기가 50~60여m 길이마다 달라져, 한 그물에 크고 작은 멸치가 다양하게 걸린다).

멸치가 주로 잡히는 지역은 미조항에서 20~40마일 떨어진 바다. 더 멀리는 60마일 바다까지 나간다. 잡히는 멸치는 예닐곱 가지. 크기순으로 세멸(지리), 자멸(시레기), 소멸(가이리;이상 볶음용), 중멸(고바;고추장용), 대멸(디포리와 다시멸;국물용) 등으로 나뉜다. 요즘 미조항 앞바다에서는 주로 젓갈용 중멸과 까나리들이 그물을 채운다. 마른 멸치용 멸치는 6~11월, 국물용 대멸은 주로 7월~3월 말에 남해 근처에 떼로 몰려온다. “멸치가 많이 날 때는 한 척당 4000상자(상자당 27kg 기준)까지 끌어 올린다”라고 최 계장은 말했다.

ⓒ시사IN 백승기미조항에서 한 상인이 경매로 구매한 까나리를 나누어 담고 있다.

낮 한 시. 새벽에 멸치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곧장 항구로 들어오지 않고 방파제 안쪽 바다에 떠 있는 ‘바지선’ 옆에 배를 대는 게 아닌가. 어렵사리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앙바틈한 어부 예닐곱 명이 멸치가 가득 꿰인 그물을 오달지게 털어댔다. 그때마다 은빛 멸치들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바다에 깔아놓은 그물에 떨어져 내렸다. 아름답다 못해 숙연한 풍경(남해군은 왜 이 멋진 볼거리를 관광 상품화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남해는 자칭타칭 ‘보물섬’으로 불린다. 상주 금모래 해변, 금산, 보리암, 미조항, 물건리 마을 숲의 풍경이 계절마다 바뀌는 데다, 해안 도로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와,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고나!’ 하고 이 터지는 곳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메기·갈치·흑마늘 장아찌 등도 입맛을 돋운다.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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