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문화 제공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년 김예슬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3월10일 이 땅에서 대학생이 한 명 줄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김예슬씨(25). 그녀는 학교 교정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의 학생 신분을 스스로 버렸다.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지만, 누구라도 빠져나올 엄두를 못 내는 최악의 학벌사회에서 대학생, 그것도 명문대생이 자기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어떤 이는 전태일의 분신에 이를 비유하기도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김예슬 선언’ 카페(http://cafe.daum.net/kimyeseuls)에는 3000명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그런데’ 모두가 김예슬씨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았다. 가리키는 손가락에 흠집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이들의 냉소에는 자퇴 선언 이후 김씨의 행보와 무관치 않다. 김씨는 자퇴 선언 직후 “나 개인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부담스럽다”라며 언론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리고 한 달 남짓 뒤 그녀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책 한 권을 들고 나타났다. 125쪽 분량의, 마치 시집처럼 얇은 책을 통해 그는 대자보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몇몇 언론의 인터뷰에 뒤늦게 응했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책을 팔아먹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거나, 누군가 그녀를 배후조종하고 미리 모든 걸 준비한 ‘쇼’라는 힐난이었다.      

〈시사IN〉과 김예슬의 인터뷰는 이런 세간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예슬씨는 자기 책 말미에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눈 내린 날 행한 나의 대학 거부 선언은 시든 꽃처럼 잊힐 것이다’라고 썼지만, 자신의 짐작과 달리 김예슬이 던진 돌멩이는 우리 사회에 그치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자퇴 선언 후 40일이 지난 4월20일, 진달래 피는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몇몇 질문은 트위터를 이용하는 20대로부터 받았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반응을 접하면서 많이 배우고 경청했다. 비판도 응원도 고맙기만 했다”라며 입을 열었다.

김예슬씨(위)는 자기 책 말미에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눈 내린 날 행한 나의 대학 거부 선언은 시든 꽃처럼 잊힐 것이다”라고 썼지만, 자신의 짐작과 달리 김예슬이 던진 돌멩이는 우리 사회에 그치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시사IN 윤무영

책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자퇴 선언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반응을 보면서 대자보로는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주변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들과 함께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이 한 달 만에 나온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다.
내 책상에 노트가 30권 정도 있다. 대학 입학 후 마주친 의문에 대해 그때그때 적어나간 것이다. 이 노트를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책이 한 달 만에 나왔든 하루 만에 나왔든, 그 내용에 더 주목해줬으면 한다.

대자보를 통해 자퇴를 선언한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을 하려는 것 아니었나. 그동안 왜 언론과 접촉을 피했나.
나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보다는 대자보의 메시지에 집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때는 이미 수많은 이가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어서 내가 덧붙일 게 없었다. 다시 인터뷰에 나서게 된 건 책을 썼기 때문이다. 책은 만날 수 있는 이들이 한정돼 있으므로 언론을 통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행보를 두고 ‘쇼’라는 비판도 있다. 
그런 의문을 가질 법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내가 더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설명될 리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말이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보여드리겠다는 것 외에 더 드릴 말씀이 없다.

지금 대학을 ‘자격증 장사 브로커’ ‘배움도 물음도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자퇴를 선언한 계기가 뭐였나. 
2006년에 시민단체 나눔문화를 친구 소개로 찾아갔다가 박노해 시인과 대화하면서 ‘그만 배우고 생각하기’ ‘그만 생각하고 행동하기, 지금 바로 살아가기’라는 화두를 접했다. 2004년 입학 후 경쟁과 취업에 매몰된 대학을 보면서 계속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 그 이후 실제 ‘그만 배우기, 살아가기’를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4년이 걸린 셈이다.

〈시사IN〉과 김예슬 사이에는 작은 인연이 있다. 2007년 여름 〈시사IN〉 창간을 앞둔 〈시사저널〉 기자들이 서울 아현동 심상기 〈시사저널〉 회장 자택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 나눔문화 회원들이 지지 방문을 온 적이 있다. 그중에 대학생 김예슬씨가 있었다. 그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개사한 ‘기자들,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러 파업 중인 기자들에게 힘을 보탰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번 선언이 있기 전부터 이미 나눔문화 회원으로서 사회적 발언과 실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퇴 결정에 대해 나눔문화 사람들과 상의했는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인간 김예슬의 일생을 건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2007년 〈시사저널〉 기자들이 단식 농성을 벌이는 곳에 김예슬씨(맨 왼쪽)가 지지 방문을 왔다.

이번 책에서 진보 언론과 진보 인사들에 대해 좀 더 ‘래디컬’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그분들은 대학이 문제라면 (자퇴할 것이 아니라) 등록금 인하나 무상교육을 요구하라고 말한다. 등록금 인하 투쟁은 분명 필요하지만,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등록금 투쟁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시간에 스펙을 쌓아서 어서 빨리 취업해야겠다는 식으로 접근하게 될 수도 있다. 과거 선배들은 민주주의·인권 가지고 싸웠으면서 우리에게는 그런 경제적 싸움을 하라는 게 역설적이었다. 그들이 우리 세대에게 그런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치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쪽에서는 이념의 과잉이라고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우리에게는 삶의 가치가 사라지고 이익만 남았다. 요즘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를 모델로 삼지만, 모든 인류가 다 그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 ‘국가경쟁력’ 같은 말을 외치며 살게 된다. 그 결과 경제만 살리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 미끄러지게 된 것 아닌가.

그런 일은 체제 내, 대학 안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토익 공부하면서 그런 가치를 나누는 활동을 할 수 있지 않나.  
지금은 저항과 탈주 둘 다 필요하다. 저항하는 한편으로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와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내게는 토익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삶을 모색하라는 건 심장을 두 개로 나누어 살라는 말과 같다. 나더러 극단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자퇴하면서 최소한의 저항밖에 하지 않았다. 분신자살이나 총기난사를 한 것도 아니다. 정말 극단적인 건 대학을 위해 12년 동안 매달려야 하는 이 시스템이다. 여기서 나부터라도 빠져나오자고 결심했다.

지금 시대에 대해 ‘대학-시장-국가’가 합쳐 ‘억압의 3각 동맹’을 이룬다고 했는데, 어렴풋하게나마 바라는 사회의 상이 있나. 이를테면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 체제 같은. 
국가가 마련하는 복지가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국가의 돈에 기댈수록 실제 개인 삶의 자율성은 작아진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자가 되어가면서 스스로 뭔가 하는 능력은 퇴화한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움은 학교에서, 의료는 병원에서, 종교조차도 어떤 제도화된 곳에 맡기고···. 아직 뚜렷한 답은 없지만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으며 살 수 있는 자급자족 공동체가 먼저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건 작은 마을일 수도 있고, 농촌공동체일 수도 있다. 

기존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기자의 시각에 김예슬씨의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사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울림이 있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다소 공허한 대답이 되돌아오고는 했다. 일부에서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를 두고 ‘치기 어린 행동’이라고 냉소하는 데에는 그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막 실존의 몸부림을 친 청년에게 어떤 해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할 수도 있겠다.

고대생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학 자퇴 선언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일면 맞다. 뿌리 깊은 학벌 시스템의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내 행위가 똑같은 학벌주의의 눈으로 수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내게 고대라는 사회적 자본은 사라졌다. 내게 진짜 사회적 자본은 그런 고민을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뿐이다. 한편으로 내 선언이 대학 문턱을 밟지 못한 분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다. 

뜻밖에 20대 일부가 당신을 냉소하더라. 당신이 앞으로 사회운동을 하는 데 이번 자퇴 선언이 또 다른 ‘스펙’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봤다.
우리 세대가 386 정치인들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자퇴 선언이) 사회적 스펙이 될 거 같으면 한 번 열심히 해보라고도 하더라(웃음). 그러나 저항하는 내 삶을 다시 이용해서 나 개인의 성공을 위해 쓰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점을 앞으로 내 삶으로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김예슬씨는 직업이 꿈이 되는 세상이 불행하다고 했다. 대학을 거부한 그의 꿈은 뜻밖에 ‘대학’을 하나 세우는 것이다. 입학시험도 졸업장도 없는 대학, 발목이 시리도록 대지를 걸으면서 묵직한 고전을 읽고 신문뉴스를 분석해 그것을 삶에 적용해나갈 수 있는, 자신의 잠재된 재능을 찾아 사회에 꼭 필요한 창업을 하고 경영하는 법을 익히는 ‘세상에 없던’ 대학···. 얼핏 보면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나 나올 법한 꿈을 이 20대 청년은 간직하고 산다. 그녀를 둘러싼 사회 안팎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넘어, 10년 뒤 혹은 20년 뒤에 그는 자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김예슬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다.

인터뷰 장소는 두 번 바뀌었다. 애초 기자는 ‘잔인하게도’ 고려대에서 만나 인터뷰하자고 요청했다. 김예슬씨에게는 20대 청춘의 한 자락이 담긴 곳이자 대학 거부를 선언한 그곳, 고려대 교정에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꽤 상징적이리라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내 ‘안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식적 답변이 돌아왔다. 김예슬씨는 자퇴 선언 이후 지금껏 한 번도 고려대에 가지 않았단다.

두 번째 장소는 나눔문화 사무실이었는데, 인터뷰 당일에 행사가 열리는 바람에 결국 인터뷰 장소를 〈시사IN〉 사무실 부근 독립문공원으로 잡았다. 공교롭게도 자퇴 선언을 한 김씨와의 인터뷰는 공원 내 ‘독립선언’ 기념탑 옆에서 진행됐다. 그녀는 “고려대보다 여기가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꽃과 나무도 많고, 지금 고려대 교정 곳곳에는 기업의 이름을 단 건물만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직접 본 김예슬씨는 인상이 밝고, 차분했다. 웃을 때 ‘호호’ 웃지 않고 ‘하하’ 웃었다. 3월10일 굳은 표정으로 피켓을 들고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죽은’ 대학을 고발하던 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신의 자퇴 선언조차 결국 ‘사회적 스펙’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예민한 질문에도 그녀는 차분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뭘 하면서 놀 때 가장 즐거운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화하면서 노는 게 즐겁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다른 젊은이처럼 인터넷에 글 쓰는 것도 즐기지만, 평소에 손글씨 쓰는 걸 즐긴다고 했다. “몸이 기억하는 글쓰기 행위는 뭔가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퇴 선언 대자보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것이었다.

영화든 연극이든 최근에 본 예술작품 중 기억에 남은 것 하나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김씨는 “매화꽃·복사꽃·진달래·개나리·할미꽃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이 제자리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봄날의 땅을 바라본 게 마음에 남았다”라고 말했다. 책으로는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의 수행과 깨달음을 담은 책 〈누구 없는가〉를 꼽았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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