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 기업들은 피에 굶주린 늑대와도 같았다. 수익 기회가 엿보이면 정경유착 같은 ‘더러운’ 방법까지 감행하며 사업권을 따냈다. 은행으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돈을 빌려 자동차나 조선 등 장기 모험 프로젝트에 앞 다퉈 투자했다. 이에 따라 한때 부채비율이 400%를 웃돌았으며, 국내 경제 전체가 과잉?중복 투자로 몸살을 앓았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준공황 사태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 경제는 당시의 신성장동력 산업(철강·반도체·자동차·조선 등)을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의 상황.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의 경영행태는 180도 바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400%를 웃돌던 부채비율이 100% 내외로 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낮은 수준이다(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최근 부채비율은 150% 선). 더욱이 대기업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익 구조가 개선되었다. 재벌 가문은 여전히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지분을 대폭 늘린 주주(특히 해외)의 눈치를 보면서 ‘모험적 실물투자’보다 ‘안정 위주의 경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업 내부에는 엄청난 돈이 쌓여 있지만 위험한 투자에는 뛰어들지 않는다.

ⓒ뉴시스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기업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시민들은 고용 불안전 등 삶의 위기에 처해 있다. 사진은 삼성 이건희 회장
한국 기업들이 ‘굶주린 늑대’에서 ‘배부른 돼지’로 급격히 변모한 것이다. 과거의 한국 기업들이 없는 돈을 빌려서까지 투자했다면 이젠 자사의 재무구조만 관리하면서 조심조심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는 현재 높은 실업률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 기업들의 이런 경영행태를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실증 연구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은 4월10일 〈재벌과 대기업은 곳간에 쌓인 돈을 풀어 투자 및 고용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다소 긴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기업들은 외환위기의 폐허를 극복한 2000년 이후 급속하게 경영실적(매출·순이익 등)을 향상시켜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내부에 쌓아두었으면서도 ‘고용 없는 성장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이 한국거래소 등의 자료를 자체 분석한 바에 따르면 500대 상장사 매출액은 2008년 전후의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급성장 추세를 견지하고 있다. 2009년의 경우, 500대 상장사 매출액은 이전 3년(2006~2008년)의 평균보다 17.8% 증가한 880조7000억여 원을 기록했다. 매출액 증가의 내용도 우량하다. 2009년 당기순이익(기업이 벌어들인 이익 중 비용과 손실을 뺀 차액)은 이전 3년의 평균 실적보다 13.2% 증가한 47조7000억여 원에 달했다.

이런 순이익 중 일부는 주주에게 배당금으로 지급되지만 나머지는 사내유보금으로 기업 내에 쌓인다.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미래의 사업을 준비하기 위한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이 지난해 400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내유보금이 많은 기업일수록 안정된 재무구조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내유보금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은 적절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해당 기업의 장기적 성장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 10대 그룹의 사내유보율(사내유보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것)은 2004년 600%(자본금의 6배)를 돌파한 데 이어 2007년 700%(7배), 2009년에는 1000%(10배)를 넘어섰다. 각각 자본금의 6배, 7배, 10배에 달하는 사내유보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1997년 한국 기업들의 사내유보율은 160% 정도였는데 겨우 13년 만에 5~6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상위 그룹으로 올라갈수록 심하다. 2009년 9월 말 현재, 포스코가 자본금의 60배, 삼성그룹은 18배, 현대차는 6배에 이르는 사내유보금을 내부에 쌓아두고 있다.

기업 자금 많을수록 고용은 어려워져?

문제는 기업이 이렇게 잘 나갈수록 고용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집단인 삼성과 현대차의 최근 경영 실적은 눈부실 정도이다. 삼성그룹 상장 계열사(금융기업 제외)들의 2009년 매출액(134조3000억여 원)은 전년 대비 17.6% 증가했다. 더욱이 당기순이익은 전년 대비 63%나 증가해 12조여 원에 이르고 있다. 사내유보금 규모도 2009년 말 현재 10조원에 달한다.

한편 현대차그룹 상장 계열사(금융기업 제외)의 2009년 매출액은 전년(78조원)보다 12조원 정도 줄어든 66조여 원이다. 그러나 이 그룹의 당기순이익은 비용 절감과 주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전년보다 66.5% 증가한 6조여 원에 달했다. 사내유보금은 5조원 정도. 그러나 같은 기간, 두 그룹 모두 고용 여건이 급격히 나빠졌다. 당기순이익 1억원당 정규직 고용의 수를 보면, 삼성그룹의 경우 2007년 12월 말 1.64명에서 2009년 말에는 1.16명으로 급락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에도 2006년 3.54명에서 2009년 말에는 1.79명으로 절반이나 떨어졌다.

ⓒ뉴시스당진 일관제철소 제1고로 풍구에 화입하고 있는 정몽구 회장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연구위원은 “양대 그룹은 영업실적이 지속적으로 호조를 보이고 있는데도 고용 창출을 회피하면서 필요 노동력을 비정규직이나 외주화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차의 경우 2009년 말 현재 생산직 정규 노동자가 3만여 명인데 사내하청 노동자가 76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현대차 계열 자동차 부품회사인 현대모비스는 정규직 생산직이 1918명에 불과한데 사내하청 노동자는 2684명에 이른다.

이른바 한국 국적을 가진 기업들은 ‘잘나가는데’ 시민은 고용 불안정에 허덕이게 된 사태다.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에 몸 바치고, 비싸고 질 낮은 국산품을 애써 구입하면서 대기업을 키워준 시민의 자녀와 손자들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

이런 사태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LG경제연구소 박상수 연구위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한국기업 자금운용 보수화 경향 뚜렷〉)에서 중요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국내 기업의 자산 중 투자위험이 낮은 현금성 자산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는 반면 투자위험이 높은 유형자산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여기서 현금자산은 현금이나 금융상품이다. 유형자산은 주로 기계 등 설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박 연구위원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한국 기업의 총자산이 연평균 8% 증가해온 가운데 현금성 자산의 증가율은 매년 14.4%에 달했지만 유형자산 증가율은 3.7%에 머물렀다. 한국 기업들이 그동안 사내 자금을 기계설비(유형자산)에 투자해서 사업을 전개하기보다 금융상품을 매입해서 ‘자산 지키기’ 내지 돈놀이를 해왔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은 2000년 말 31조원 정도에서 지난해 100조원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이런 경영 행태는 한국이 미국·일본·타이완보다 훨씬 심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급속히 현금성 자산이 증가하고 유형자산은 줄어드는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업들의 유형자산 투자가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국내 기업의 생산설비도 빠르게 노후화하고 있다. 국내 생산설비의 ‘노후화 수준’은 2000년 말 35.5%에서 2009년 말에는 56.5%로 크게 증가했다. 현재 사용 중인 생산설비들이 사용 가능한 연한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한국 기업의 배당금 지급액도 2000년(3조여 원) 이후 매년 14.5%씩 증가해 2009년에는 8조5000억여 원으로 늘어났다.

결론적으로 2000년 이후 국내 기업들의 경영 행태는 순이익 중 배당금과 금융상품 투자를 많이 늘리는 반면 실물투자는 오히려 줄이는 쪽으로 갔다. 공격형에서 수성(守成)형으로 돌변한 것이다.  LG경제연구소 박상수 연구위원은 〈시사IN〉과 한 인터뷰에서 ‘정보화 사회의 영향’ ‘단기 성과주의의 기업경영 압박’ 등을 기업 자금운용 보수화의 원인으로 들면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 기업들이 지속적인 성장기반 확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보수적 자금운영 기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래 수익의 창출을 위해 신사업 투자를 확대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외국인 주주들에 포위된 재벌

이와 관련해 금융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연구위원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현금성 자산 중 10%만 재투자해도 신규 일자리 2만7820개를 만들 수 있다. 금속노조는 2010년 교섭요구안으로 2009년 당기순이익과 이전 3년(2006~2008년) 순이익 평균치 간의 차액을 청년 노동자 신규 채용 및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사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인 일자리 만들기에 대한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촉구하는 정당한 요구이다.”

그러나 ‘신사업 투자’든 ‘사회적 책임’이든 삼성·현대 같은 글로벌 기업이 그대로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기업은 주주, 특히 투자보다 안정성을 강조하는 외국인 주주들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재벌 가문의 경영권은 매우 굳건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까지는 후한 배당금 등으로 주주들의 입맛을 맞추는 데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가문이 위험하지만 기대수익도 큰 ‘신사업 투자’, 정규직화를 통한 ‘사회적 책임’ 등에 감히 자금을 배분할 수 있을까.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국가경제적 차원에서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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