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한국은행법 개정안’ 국회통과를 둘러싸고 한은과 정부(금융위원회와 집행기관인 금융감독원)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온 가운데 지난 4월1일 ‘친정부 인사’로 분류되는 김중수 전 OECD 대사가 한은 총재로 취임했다. 한은의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그동안 한은은 고유 업무인 통화신용정책(금리 운용을 통한 통화량 조절)을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을 빚어왔다. 전임 이성태 총재가 “현 기준금리는 엄청 낮은 수준 … 정상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금리인상을 시사하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금리인상 시기상조론’으로 맞불을 놓는 식이었다. 이는 명백히 정부(기획재정부)의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침해였다. 한은은 포괄적 의미의 ‘정부’에 속하지만, 정부의 의지에 관계없이 자립적으로 금리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률적·규범적으로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은 ‘정부’지만 ‘정부가 아닌’ 어떤 것이다.

ⓒ뉴시스한국은행 김중수 신임 총재(왼쪽)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정책 공조를 다짐하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와 함께 1997년 IMF 사태로 한은이 ‘은행감독 권한’을 박탈당한 이후 고유 업무인 ‘금리 운용을 통한 통화량 조절’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았다. 은행은 신용창출 기능을 통해 통화(M1)를 창출하는 준공공적 기구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제대로 조절하려면 은행을 관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 등 상당수의 선진자본주의국에서는 중앙은행이 통화신용정책과 함께 은행감독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엔, 정부기관(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은행을 감독하면서 중앙은행의 고유 업무(금리운용)에까지 개입한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 한은이 얼마나 무력화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지난 2006년의 부동산 폭등 사태다. 당시 한은은 은행권의 과잉대출과 이에 따른 부동산 파동을 막기 위해 콜금리를 몇 차례나 거듭 인상했다. 그러나 과잉대출은 중단되지 않았다. 특히 외국은행 지점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 국내에 뿌렸기 때문이었다. 이 해 1분기 외은지점들이 뿌린 자금은 무려 8조원에 달했다. 한은은 속수무책이었다. 은행감독이나 외환시장에 대한 권한 없이 금리운영 권한만으로 통화량 조절이 어렵다는 것을 입증한 사태였다.

‘한은 맨’들에게 ‘한은 위상 바로 세우기’는 오랜 숙제였다. 대의명분도 있다. 이성태 전 총재가 금리문제로 정부와 각을 세우고 한은법 개정에 힘을 보탠 것은 한은맨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수 총재는 지난 3월 내정되자마자 “한은의 정치적 독립이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가와 성장이 상충될 때 최종 판단은 대통령이 하는 것” “한은도 정부의 일부” 등 ‘중앙은행 독립성’에 치명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자신이 주재하는 첫 금융통화위원회(한은 총재 주재로 이사 7명이 금리정책을 결정) 나흘 전인 4월5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화기애애하게’ 만났다. 두 사람은 “한국은행과 정부가 잘 공조하기로 인식을 같이 했다”고 입을 모았다. 또 올해 1월부터 기획재정부 차관이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열석발언권(의결 권한은 없으나 발언권을 가짐)을 행사하면서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라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도 계속될 전망이다.

ⓒ뉴시스기획재정부의 개입에 대항해서 ‘한은 독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
‘시장’에서는 ‘이미 한은 독립은 끝났다’고 보는 분위기다. 금리는 김중수 한은 총재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한은 노조 조태진 수석부위원장은 “김중수 총재는 정부와의 조화만 강조하는 듯하다. 한은 노동조합은 우려 속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상태다. 두고 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진리인가

이처럼 이명박 정부가 ‘중앙은행 독립성’을 치명적으로 침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이른바 ‘중앙은행 독립성’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이다.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가급적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려고 한다. 중앙은행은 이런 정부의 의지와 상관없이 장기적 경제전망에 기반해서 독립적으로 금리를 조절하면서 통화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 ‘중앙은행 독립성’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규범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있다.

진보적 성향의 경제학자인 매사추세츠 대학 엡슈타인 교수는 “‘중앙은행 독립성’은 세계금융위기를 불러온 시스템의 사상과 정책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교리’의 일종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중앙은행 독립성’의 이론적 배경엔, 국가개입 없는 금융시장이야말로 자금을 최적 배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국가가 통화량을 조절해서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려 해도 고용 등 실물경제를 움직일 수는 없으며 기껏해야 물가인상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정부를 견제하며 통화량을 실물경제가 성장하는 정도 내로 억제해서 물가인상을 저지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런 논리는 한국은행법에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을 “물가안정 목표의 달성”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명확히 반영되어 있다. 한국은행의 책임은 물가인상을 막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 연방준비은행법(중앙은행법)은 물가안정 이외에도 ‘고용 최대화’ ‘장기적 금리 안정’ 등을 목표로 설정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약한 편이다.

이는 물가뿐 아니라 고용, 국제수지, 경제성장 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통화정책을 ‘물가인상 저지가 지상 목표인 조직’에 맡길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엡슈타인 교수는 물가관리가 지상 목표인 중앙은행은 자연스럽게 금융자본의 대변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의 정치적 동맹자는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이다. 중앙은행 인사들과 은행가들은 매일 만나고 교류하며 호의를 나누는 가운데 경제를 보는 시각까지 공유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 같은 것은 없다.”

중앙은행의 목표(물가안정)는 금융자본의 ‘갈망’이기도 하다. 돈을 투자하고 금융수익(이자나 배당금)을 얻는 금융자본의 입장에서 물가인상은 그 자체로 수익성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캠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적절한 물가인상은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물가인상 저지라는 중앙은행의 설립목적은 금융자본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립성’을 비롯한 중앙은행의 위상과 역할이란 문제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고 있다.

은행 감독 문제를 둘러싼 권력투쟁

지난해 말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의결된 한은법 개정안은 이런 모순들을 한국은행의 권한 향상으로 일부 봉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한은 설립목적에 물가안정과 함께 “금융안정”을 추가한 것이다. 이 “금융안정”엔 사실상 한은의 은행 감독권을 일부 부활시킨다는 함의가 있다. 통화신용정책을 책임지는 한은이 통화창출 기구인 동시에 재무상태가 악화되는 경우 엄청난 사회적 재앙을 일으키는 은행을 일부 관리토록 하겠다는 내용.

그래서 현재 ‘정부 기구’인 금융감독원에 독점되어 있는 금융기관 검사권을 한은에도 부여하고, 이런 공동검사를 금감원이 꺼리는 경우엔 한은이 단독으로 은행 재무상태 등을 검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은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검사’ 내지 ‘조사’이지 ‘감독’이 아니다. 그래서 은행을 제제하거나 시정명령을 내릴 수도 없다.

ⓒ연합뉴스한국은행 노동조합이 ‘한은 독립’과 ‘물가 안정’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행 은행감독 기구인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개정안에 필사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한은 대 금융위원회의 싸움은 현재 국회 기획재정위대 정무위의 싸움으로 비화되면서 개정안의 4월 국회통과를 무망하게 만들고 있다.

한은-금감위(금감원) 간의 갈등은 분명히 권력투쟁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시중은행 노조를 주축으로 이뤄진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의 4월7일 성명서를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혹시 개정안이) 한국은행의 극심한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돌파구는 아닌가. (이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권을 이점으로 삼아 출신 인사들을 금융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보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은행감독을 독점하고 있는 금융감독원 출신들이 지난해엔 23명이나 시중은행 감사로 들어가는 등 은행과 금융유관기관(은행연합회, 손해보험연합회 등)의 ‘좋은 일자리’를 ‘싹쓸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의혹’이다. 이처럼 한은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들이 ‘엘리트 간의 이권 투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한은과 금감원은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통화신용 및 은행감독 정책을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정부는 이성태 전 총재로 대표되는 견제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금리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대폭 키웠다. 시장은 앞으로 한동안 저금리 정책이 지속된다는 신호를 받고 있으며 이는 정부 및 가계부채의 폭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 한은은 ‘물가안정 일변도’의 체질로 국민경제에 대한 더 많은 권한을 감당할 수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한은 총재가 주재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이사진 7명은, 한은과 상공회의소, 금융위원회, 은행연합회, 기획재정부 추천인으로 이뤄지는 데, 이는 사실상 금융자본-산업자본-정부의 삼각 동맹을 통해 통화신용 정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는 “중앙은행의 위상엔 정답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통화신용 및 감독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영국은 분리되어 있다. 한국은 영국 모델과 비슷하다. 이엔 정답이 없다. 예컨대 중앙은행 독립성을 외쳐온 한은은 지금까지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원화가치를 떨어뜨리곤 했는데 이는 국민의 이익을 도외시한 일방적 수출 대기업 지원이었다. 특정 모델을 떠나 중앙은행이 어떻게 국민에게 이바지할 수 있는지 구체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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