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해 구체적인 조처를 취하겠다. 냉전식 사고방식을 종식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국가안보 전략에서 핵무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겠으며,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행동을 촉구하겠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4월5일, 취임 후 처음으로 동서 냉전의 상징인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방문해서 한 연설 내용이다.  냉전이 끝난 지 20년이 흘렀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가진 핵무기만 2만 개가 넘을 정도로 세계가 핵 과잉 상태이며,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미국부터 솔선수범하겠다는 자신의 비전을 담은 공언이기도 했다.

핵 없는 세계를 향한 비전이 담긴 ‘프라하 선언’이 나온 지 정확히 1년 뒤인 4월6일 오바마 대통령은 이 공언을 실천하기 위한 실질 조처를 취했다.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명시적이고 새로운 핵정책이 담긴 ‘핵태세 검토보고서(Nu– 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한 것이다. 이는 1994년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 시절과 2002년 공화당 부시 행정부에 이은 세 번째 보고서이다. 

ⓒReuter=Newsis4월6일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왼쪽)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이 발표한 ‘핵태세 검토보고서’에 대해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언제 핵무기를 사용할지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해왔다. 이른바 ‘고의적인 모호성’(calculated ambiguity) 유지라는 내부 지침에 따라,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와 대규모 재래식 무기를 포함한 다양한 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신뢰할 만한 군사적 선택 방안을 제공하는 데 핵무기가 필요하다”라는 막연한 정책만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불분명함이 이번 핵태세 검토보고서에서는 제거되고, 비교적 분명하게 핵 공격 대상과 범위가 정해진 것이다. 냉전 이후 가장 획기적인 핵 정책이 담긴 이번 보고서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앞으로 새로운 형태의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으며, 다른 하나는 미국이 국제 핵 질서를 준수하는 비핵 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4월8일 체코 프라하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전략무기 감축협정에 조인하고, 4월12~13일 세계 40여 개국이 참여하는 워싱턴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에 대한 굳건한 소신을 실행에 옮길 계획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핵전략은 2002년 공화당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제시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핵은 물론 생물학 무기나 화학 무기, 심지어 재래식 무기에 의존하는 적국에 대해서조차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지 않았다. 또 적국의 잠재적인 위협이 현실화되기 전에 먼저 공격할 수도 있다는 ‘선제공격론’을 제시해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새 핵전략은 비핵보유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는 한편 설령 이런 비핵보유국이 생물·화학 무기처럼 비재래식 무기로 공격해도 핵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우발적 핵전쟁’에 대책 미흡

여기서 예외가 있다면  북한과 이란처럼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4월6일 핵태세 검토보고서 발표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 직접 이란과 북한을 거명하면서 “규칙을 따르지 않고 핵 확산국이 되겠다면 미국은 모든 선택을 탁자 위에 올려놓겠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를 위해 구체적 비전을 제시했지만, 여기에는 허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예로 오바마 대통령이 핵에 치중한 냉전식 사고방식을 종식시키겠다고 했지만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이 끝난 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상호확증파괴(MAD)’라는 냉전식 핵 억지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상호확증파괴’란 미국과 러시아 어느 나라든 핵전쟁을 하면 서로 반드시 망하기 때문에 서로 억지할 수밖에 없다는 개념이다. 물론 두 나라가 의도적으로 핵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핵탄두가 실린 탄도미사일의 오발로 우발적인 핵전쟁이 터질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번 핵태세 검토보고서는 이런 점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AP Photo2008년 4월9일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앞)이 자국의 핵 관련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또 미국이 신형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몬테레이 국제대학원의 비확산 전문가 스티븐 슈워츠 박사에 따르면, 이미 실험은 했으되 한 번도 실전 배치된 전례가 없는 핵탄두는 ‘신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92년까지 모두 핵무기 실험을 1030차례 단행해 65종류의 핵탄두를 개발했고 이를 실전 배치했다. 이 중 25종은 실험은 했지만 생산 직전에 취소됐다는 게 슈워츠 박사의 진단이다. 그러니까 25종 가운데 일부는 언제든 부활할 여지를 남겨놓은 셈이다. 핵 테러 지원국에 대한 응징 문제도 또 다른 허점이다. 이번 보고서는 “핵 테러 집단을 지지하는 나라에 전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한 부시 행정부 시절의 핵전략 대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테러주의자들이 핵물질을 러시아 공장에서 훔쳤다고 했을 때 과연 미국이 러시아에 책임을 물어 실제로 응징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는 게 일부 전문가의 지적이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 내 여론도 찬반 양론으로 갈려 있다. 우군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는 오바마 대통령의 핵태세 검토보고서 내용을 크게 반기면서도 ‘미국이 선제 핵 사용국이 되지 않겠다’고 천명하지 않은 점은 유감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오바마 대통령이 전통적인 핵 정책을 약화시켰다며 강력히 반발한다. 러시아와 조인한 전략무기 감축협정은 상원의 비준을 요하기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 측 비판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비준을 받으려면 공화당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오바마 대통령이 ‘핵 없는 세계’라는 비전을 실현하려면 러시아·중국 같은 적성 핵 보유국이나 이란 같은 핵 야욕국의 협조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범공화계 보수파의 거센 저항부터 넘어야 할 판이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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