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1월30일 법정 구속된 신구범 전 제주 도지사.

“판사의 금도를 지킨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억울하게 감옥 가는 것을 수수방관했다는 죄책감이 큽니다. 차라리 제가 감옥에 가 있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 신용인 판사(41·사시 40회)가 12월3일 ‘법정 구속당한 아버지를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의 일부다. 그가 억울하게 감옥 갔다고 표현한 아버지는 신구범 전 제주도 지사. 신 전 지사는 지난 11월30일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특가법상 제3자 뇌물공여죄 혐의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법원 내부 통신망을 통해 신 판사는 “아버지 사건의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다”라며 서울고법 판결에 강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는 더 나아가 “도지사 선거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생긴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재판부로 하여금) 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했고 그 결과 오판을 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신용인 판사의 글이 전국 판사들과 법원 직원들이 보는 내부 통신망을 통해 공개되자 사법부 내에는 적잖은 파문이 일었다. 그의 불우한 처지를 위로하는 댓글이 수십 개나 올랐고, 그 가운데는 “판사조차 공정하게 판단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재판을 하는 곳이라면 이 조직은 앞으로 어떤 명분을 가지고 존재해야 하나요”라며 자괴감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법원의 공식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법정 구속된 아버지를 둔 자식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판사로서는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것. 신 판사는 이 글을 올린 지 하루만인 12월4일 끝내 법복을 벗었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변호사로 재상고심 법정에 서겠다며 비장한 선택을 한 것이다.

신구범 전 제주 도지사는 10년 전 지사 시절 재미동포로부터 30억원을 기부받아 자기 개인 소유 과수원 5289㎡를 복지재단 부지로 헌납(위)한 뒤 ‘은혜마을’을 세웠는데, 법원이 뇌물 30억원을 받은 것으로 판결했다며 억울해하고 있다.

전직 도지사 아버지와 현직 판사 아들이 얽힌 드라마 같은 이 사건의 내막은 무엇일까. 법원 판결 내용으로만 보면 사건의 핵심 쟁점은 간단하다. 신구범씨가 초대 민선 제주 도지사로 재직하던 1996년 초 제주 도내에 사업체를 둔 미국 교포 한 아무개씨로부터 사회복지법인 은혜재단 설립 기금으로 30억원을 받았는데 이는 한씨가 원하던 도내 우보악관광지구 개발 허용에 따른 대가성 ‘뇌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 전 지사는 ‘어느 정신 나간 공직자가 뇌물을 자기 통장 계좌로 받겠느냐’라며 이는 순수한 사회복지시설 건립용 민간 기부금일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법원은 당시 기부금 30억원이 실제 은혜재단 양로원 설립에 사용되었지만 재단 이사에 한때 신 전 지사의 부인이 등재된 점을 ‘노후 대비용’으로 보고 ‘광의의 부정한 청탁’이라고 간주했다.

 

신구범–우근민 정치 암투가 사건 배경

그러나 사건 발생 10년이 넘도록 지리하게 끌어온 재판이 보여주듯 이 사건의 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뿌리는 지난 10여 년간 제주도에서 도지사 선거 때마다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던 신구범, 우근민 두 전 제주 도지사의 오랜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정치의 역사를 잘 아는 제주 한마음병원 이유근 원장은 “‘신파’와 ‘우파’의 대립이라는 제주 지역 특유의 갈등 정치를 모르면 신구범씨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신파란 신구범 세력, 우파란 우근민 세력을 일컫는다.

1993년부터 관선 제주 도지사를 지낸 신구범씨가 도내에서 우근민씨와 숙명적 ‘정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 때는 1995년 첫 도입된 민선 자치단체장 선거부터였다. 김영삼 정부가 집권 여당 제주 도지사 후보로 우근민씨를 내세우자 신구범 지사는 무소속 출마를 감행해 선거에서 이긴다.

문제의 은혜재단 기부금을 받은 때가 이 시기였다. 제주도에 대유수렵장을 소유하고 있던 재미 교포 한 아무개씨의 부인이 신 지사가 다니던 교회 목사를 통해 제주도에 장애인 복지시설 설립 기부금을 내놓겠다고 제안해온 것. 한국야쿠르트 사장 딸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한 그녀는 아들이 가와사키병이라는 난치병에 걸려 고생하면서 불우이웃 시설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동기를 밝혔다고 한다. 그동안 서울 등 전국 각지의 사회복지시설에 100억원대 기부금을 내놓은 전력을 파악한 신 전 지사는 그녀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자기가 제주도에 소유했던 과수원 땅 1600평을 복지재단 부지로 내놓았다. 대신 부인을 재단 이사로 등재한 뒤 30억원을 기부받아 양로원 은혜재단을 설립했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은 1998년 제2대 민선지사 선거전에서였다. 집권당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선 우근민씨와 또다시 무소속 후보로 맞붙은 이 선거 과정에서 우 후보 측이 은혜재단설립을 부정비리 사건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이에 맞서 신구범씨는 도지사 후보 경선 과정에서 우근민씨가 대의원을 매수했다고 맞불을 놓는 등 상호 혼탁 선거전을 거친 끝에 이번에는 우근민 후보가 지사에 당선했다. 신 후보가 낙선하자 제주지검은 곧바로 은혜마을 뇌물수수 의혹 사건 수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검찰은 신구범씨를 기소할 근거는 찾지 못했고 복지재단 건축 공사를 맡은 건설사 사장을 세금 포탈 따위 혐의로 구속시키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다. 

ⓒ시사IN 정희상구속되기 직전까지 신구범 전 지사가 경영하던 제주시 소재 농업법인 (주)삼무.

제주지검이 내사 종결한 은혜마을 사건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때는 2000년 8월. 서울중앙지검은 이 사건 수사에 재착수했다. 당시는 신구범씨가 축협중앙회장으로 있던 때였다. 그 무렵 신구범씨는 농림부가 축협과 농협의 통합을 주요 내용으로 한 농협조합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이를 심의하던 국회 농림수산위 회의장으로 찾아가 통합에 반대하며 공업용 칼로 할복을 기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할복 사건으로 신씨는 농림부로부터 서울중앙지검에 업무방해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했는데 이때 은혜마을 사건까지 재수사 대상에 추가된 것이다. 검찰은 신씨에 대해 은혜마을 30억원 뇌물수수 혐의로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1차 기각당했다. 그러자 검찰은 기부자인 재미 교포 한 아무개씨를 미국에서 소환 조사, ‘대가성 기부’라는 진술을 받아내 영장을 재청구함으로써 끝내 신씨를 구속한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을 받던 신구범씨는 은혜마을 재수사 및 기소가 플리 바게이닝(사전 형량조절제도)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주장하며 검찰과 각을 세운다. 당시 서울신문에서 신구범 전 지사 구속 사건에 대해 ‘은혜재단 설립자금 30억원 기부자인 재미 교포 한 아무개씨가 검찰로부터 100억원대 탈세 횡령 혐의 기소중지 사건을 없던 일로 해주는 대가로 신 지사에게 대가성 기부금을 줬다는 진술을 해주는 유죄 협상을 했다’는 요지로 폭로 보도했다. 뒤이어 서울지법은 신씨의 은혜마을 뇌물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억울함을 참지 못한 신씨는 결국 수사 검사를 고소하는 방법으로 대응한 것이다.

2002년에 실시된 제주 도지사 선거전에서 현직 우근민 지사와 신구범씨는 다시 맞붙었다. 당시 선거전에서 두 사람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 선거 직전 우근민 지사가 도지사실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만졌다는 성추행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피해 여성이 우 지사의 정적인 신구범씨를 찾아가 성추행 사실을 제보하자 신씨는 여성단체와 서울 민변에 찾아가 상담하라고 조언해준 것. 그 결과 제주여민회가 이 사건을 폭로하기에 이르렀고 다급해진 우 지사는 ‘신구범 음모론’을 제기하며 이 여성을 검찰에 고소했다. 선거를 앞두고 조사를 벌인 검찰은 투표 전 정치적 음모론에 무게를 두고 성추행은 없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신구범 후보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결국 이번에도 우근민씨가 제주 도지사에 당선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 여성부는 이 사건을 정밀 조사해 우근민 지사의 성희롱을 인정하고 1000만원의 손해배상 및 재발방지 시정 조처를 내렸다. 우 지사는 이에 불복해 행정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서까지 패소했다. 이 사건으로 검찰과 우 지사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신구범씨는 우 지사를 허위 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우 지사 측도 신구범씨가 고교 동문 제주도청 공무원들을 상대로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며 선거법 위반 혐의로 맞고소했다. 결국 검찰은 두 사람 모두 기소했다.

"법원 비판하자 무죄가 유죄로 둔갑"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신구범씨는 이번에는 공교롭게도 재판부와 악연을 맺게 된다. 신씨 사건 재판 담당 부장판사가 우근민 지사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와 골프를 치고 향응을 받는 장면이 일부 지역 언론 기자들에게 포착된 것. 다급해진 부장판사는 보도를 막게 해달라며 피고인인 신구범씨 측 변호사에게 부탁을 넣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 제주 지역 신문은 칼럼을 통해 이 내용을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조사를 벌여 신씨 사건 담당 부장판사는 다른 지역으로 전출당했고 재판은 제주지법원장이 직접 맡았다. 제주지법은 2003년 신씨의 사전 선거운동 혐의에 벌금 150만원의 유죄를 선고해 신씨는 5년간 공직 선거에 나올 수 없게 됐다. 이를 법원의 보복으로 여긴 신 지사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지법 골프 향응 사건과 대법원의 봐주기 조사’ 의혹을 폭로한다.

ⓒ시사IN 정희상10년 전 신씨가 기부한 과수원 부지에 들어선 제주시 외곽 사회복지법인 은혜마을 양로원.

한편  1심 법원의 무죄 판결에 불복해 검찰이 항소한 은혜마을 뇌물수수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서울고법은 2004년 2월 신구범씨에 대해 ‘제3자 뇌물공여죄’를 인정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를 법원의 권위에 도전한 데 따른 보복 행위로 여긴 신구범씨는 미국에 거주하는 은혜재단 기부자 한 아무개씨로부터 ‘검찰의 강압 수사로 대가성 복지 후원금 30억원을 기부했다는 허위 진술을 했다’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받아 대법원에 제출하고 상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1월 신씨의 명예훼손 혐의만 무죄로 인정하고 뇌물수수 혐의는 유죄라는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지난 11월30일 다시 2년6월 형을 선고한 뒤 신씨를 법정 구속한 것이다.

신구범씨는 법정 구속된 직후 면회 온 큰아들 신용운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그들이 나를 감옥에 넣을 권한이 있느냐. 내가 죄가 있다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죄가 없다. 어떻게 그따위 엉터리 재판을 하느냐. 나는 이제 사법부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면회 후 신 판사는 “판사를 불신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재판에서 오판으로 당사자에게 상처를 줘 아버지를 통해 벌을 받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라고 썼다.

지난 2002년부터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 배속돼 판사 생활을 해온 신구범씨의 큰아들 신용운 판사는 눈물을 삼키며 법복을 벗어던졌다. 신 판사는 지난 판사 생활 과정에서 아버지와 관련해 속앓이했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그동안 평범한 아버지를 둔 사람을 제일 부러워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냥 농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법원 판결 이후 그런 생각과 마음을 모두 내려놓습니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사랑합니다”. 가족에 따르면 신구범씨는 구속된 후 계속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