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삼성전자. 하지만 ‘또 하나의 가족’이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2009년 12월까지 확인된 백혈병·림프종 등 조혈계 암 발병자만 22명.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사 결과에서도 2007년까지 기흥공장 14명, 온양공장 4명, 수원사업장 1명이 조혈계 암에 걸렸다. 기흥공장 6명, 수원사업장 1명이 사망했다.

집단 발병은 우연일까? 이건희 회장이 복귀한 삼성. 삼성은 개인적 질병뿐이라고 해명한다. 산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삼성이 침묵하는 사이 희생자들은 계속 늘고 있다. 스물세 살 박지연씨가 또 다시 사경을 헤매고 있다.
(3월31일 스물 셋 꽃다운 나이에 박지연씨는 끝내 눈을 감았다)

글 싣는 순서
1)꿈의 공장에서 죽어가는 또 ‘하나의 가족’
2)삼성 광고를 안 보는 ‘또 하나의 가족’


3월31일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던 박지연씨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다 끝내 눈을 감았다. 어머니 황금숙씨가 20분간의 짧은 면회시간을 마치고 나올 즈음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닷새만이었다. 스물 셋, “오래 살고 싶다”라던 지연씨의 소원은 그렇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연이가 다 됐다.” 어머니는 대성통곡하며 제대로 걸음조차 옮기지 못했다.

영정 속 박지연씨는 하얗고 고왔다. “아이고, 아까운 내 새끼. 이렇게 예쁜 내 새끼. 얼마나 아팠을까. 아픈 거 할머니 달라고 했잖아…엄마가 핵교 다니라고 할 때 댕기지, 왜 돈 번다고 나가 가지고…” 외할머니는 손녀딸의 영정사진을 매만지며 목 놓아 울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도대체 언제까지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시사IN 장일호고 박지연씨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넋을 놓고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기시감’ 때문인지 황상기씨(55)는 입을 앙 다문 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느냐. 지연이가 왜 죽었는 줄 아느냐. 대체 공장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쓰는 것인지 말해 보라”라며 이틀 전부터 병원에 와 있던 삼성관계자들과 드잡이를 벌인 이도 황씨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지연씨가 사경을 헤매자 병원에서 24시간 지켜왔다.

건강했을 때 박지연씨 미니홈피 모습
꼭 3년 전인 2007년 3월6일 황상기씨는 지연씨와 같은 병으로 둘째 딸 유미씨를 가슴에 묻었다. 유미씨 역시 지연씨와 똑같은 나이, 스물 셋에 세상을 등졌다. “지연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소리를 듣고 3일 밤 낮 잠을 못 이뤘어. 자꾸 지연이 얼굴에 유미가 겹쳐지더라고...” 황상기씨가 지연씨의 어머니 황금숙씨의 소주잔에 술 한 잔을 따랐다.

황유미씨는 속초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3년 10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지금은 군대 간 남동생에게 “대학은 내가 보내줄게”라고 말하던 유미씨였다. 황상기씨는 택시 운전 기사였다. 운전대를 잡았지만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결국 그 아버지 짐을 덜어주려고 딸은 대학 진학 대신 취업에 나섰다. 딸이 전문대라도 가길 원했던 아버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속초터미널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표를 직접 끊어 보냈다. 딸은 버스에 오르며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알아준다는 삼성에 입사하잖아. 걱정마세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에 취직한 딸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올림에 따르면 유미씨는 오래된 수동 라인인 3라인에서 세척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기계 한 대에 2인 1조,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4~5가지의 화학물질을 취급해야 했다.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2005년 5월이었다. 쉽게 멍이 들고, 구토와 어지럼증 증상에 아주대병원을 찾았다가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해 12월 어렵게 골수이식 수술까지 받았지만 재발해 2007년 3월6일 결국 숨졌다. 유미씨는 아버지 황상기씨와 함께 외래진료를 마치고 속초 집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차 안이었다. 차는 횡성 쯤을 지나고 있었고, 허옇게 뒤집어진 눈으로 유미씨는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아버지 황씨는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유미씨의 병이 재발하기 전인 2006년 10월 중순 삼성 관계자가 속초 집으로 찾아왔다. 그 관계자는 병가 중이던 유미씨에게 “사직서를 꼭 써야 한다”라며 백지를 내밀었다. 백지에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를 쓰라는 것이었다. 삼성 쪽의 ‘백지사표’ 강요에 황씨는 산재 처리를 해달라고 맞섰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의 입에서는 “아버님이 이 큰 회사(삼성)를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요”라는 말이었다. 결국 백지 사직서를 써줬다. 삼성 쪽은 치료비로 쓰인 8000만원 가량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황씨는 증언했다. 그러나 백지 사직서를 받자, 삼성은 태도를 돌변했다고 한다. 황씨에 따르면, 삼성 쪽은 유미씨가 숨지기 두 달 전에 찾아와 “유미는 사표를 써서 이제 우리 직원이 아니다. 그리고 유미의 병도 회사와 관련 없는 개인질병이다”라고 했다.

ⓒ반올림백혈병 투병중인 황유미씨(왼쪽), 아버지 황상기씨(오른쪽)
황상기씨는 납득 할 수 없었다. 투병 중 황씨는 속초에서 수원 아주대병원까지 통원치료를 다녔다. 그런데 아주대병원에서 치료하다 보니,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황민웅씨가 역시 백혈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유미씨와 2인 1조로 같이 일했던 이숙영씨도 똑같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숨진 것을 알았다. 전국 평균 사망률을 기준으로 보면 10만 명당 2.8명, 20세부터 44세까지 사망률은 10만 명당 1.46명이라는데, 2인1조로 근무한 유미씨와 이숙영씨(2006년8월17일 사망)가 똑같은 병으로 숨진 것이다. 아버지 황씨는 백혈병이 전염병도 아니고 가족력도 없는데 도대체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죽을 만큼 답답했지만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 없었다. 그때 민주노총 소속 이종란 노무사를 소개받았고 반올림은 그렇게 꾸려졌다.

아버지 황씨는 화장한 유미씨의 유골을 바다가 잘 보이는 울산바위 아래 흩뿌렸다. “반도체 공장 안에서 얼마나 답답했겠나. 일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겠어. 맑고 넓은 곳에 뿌렸어. 죽어서라도 자유로우라고…” 아버지는 유미씨를 떠나보낸 지 4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가슴을 친다. 딸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집안이 조금만 넉넉했더라도. 아버지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어머니는 유미씨를 잃은 뒤 화병 때문인지 우울증으로 약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유미씨 치료비 명목으로 4000만원을 건넨 삼성은 나머지 치료비 4000만원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유미씨가 숨지기 넉 달 전 삼성은 500만원을 가지고 와서 “이것으로 끝내자”라고 했다고 한다. 500만원! 이것으로 끝내자는 돈 500만원. 꽃다운 스물 세 살 죽음을 앞둔 유미씨에게 건넨 500만원은, 2004년 삼성이 반부패제도개혁을 맡게 된 이용철 변호사에게 추석 떡값으로 보낸 500만원과 같은 액수이다. 삼성이 책으로 포장해 뿌린 떡값 500만원과 백혈병으로 숨진 ‘또 하나의 가족’ 유미씨의 목숨 값 500만원. 돈을 전달한 관계자의 귀싸대기를 쳐서 돈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가난했다. 

건강할 때 황유미씨의 미니홈피 사진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이건희 회장의 지시사항 문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호텔 할인권을 발행해서 돈 안 받는 사람(추미애 의원 등)에게 주면 부담 없지 않을까? 금융관계, 변호사 검사, 판사, 국회의원 등 현금을 주기는 곤란하지만 호텔 할인권을 주면 효과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좋을 것임. 와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와인을 주면 효과적이니 따로 조사해 볼 것. 아무리 엄한 검사, 판사라도 와인 몇 병 줬다고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임.’

아버지 황씨는 언론에 보도된 이 구절을 잊지 못한다.  황씨가 삼성에 바라는 건 한가지이다. ‘도대체 내 딸이 왜 죽었는가? 왜 산재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는 지난 1월11일 제기한 행정소송으로 딸의 죽음이, 그리고 또 다른 딸들의 죽음이 산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다. 황씨는 “그렇게 돼야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 혹시나 백혈병으로 죽어도 제도적으로 보장 받을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을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다시는 유미씨처럼, 지연씨처럼 공장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지 않는 것이 아버지 황상기씨의 ‘마지막 꿈’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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