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무협 고수들의 좌파 성향에 의심을 품어왔다. 만국의 멀쩡한 소년들이 한쪽 팔소매를 옷 안으로 집어넣고 다니게 만든 외팔이 검객 왕우는 미심쩍게도 오른쪽 팔이 없었다. 〈생사결〉에서 유송인은 서소강의 무공을 폐하면서 하필이면 오른쪽 팔을 가져갔고, 이두용 감독은 외다리 3부작 이후 결정적으로 〈분노의 왼발〉을 만들었다. 냄새가 난다. 

좌파 정권 10년에 아동 성폭력이 생겼음을 간파한 안상수 의원이 영화를 활용한 좌익 용공세력의 이 음험한 사상교육 실태를 진작 깨달았더라면, 아 생각만 해도 왼쪽 고환이 저려오는 기분이지만, 아마도 영화인들에게 분노의 오른발 바나나킥을 찔러넣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 의원이 뒤늦게나마 이를 인지하고 피를 토하는 구국의 신념으로 진실을 규명하고 나섰으니, 그것이 이른바 좌파 스님론이다. ‘무협–무협 하면 소림사–소림사 하면 조계종(응?)–강남 절에 좌파 스님 안 될 말씀’으로 이어지는 명쾌한 사고과정을 통해 우리는 뒤늦게나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논쟁의 중심에 선 명진 스님은 정치 외압을 주장하면서 “아버지도 나도 육군 병장 제대했고 월남(베트남)까지 다녀왔으며 해군 입대한 동생은 훈련 중 순직해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데 내가 왜 좌파냐”라고 설명했다. 문득 지난 촛불시위 때 광장에서 자주 터져나왔던 선언들이 떠올랐다. 나는 해병대 나왔는데 무슨 좌파냐. 내가 조선일보를 몇 년째 봤는데 어떻게 좌파일 수 있느냐. 발언 뒤에는 반드시 긍정의 박수가 뒤따랐다. 그런 와중에 좌파라는 단어는 은밀하지만 사실 별 은밀할 데도 없이, 공적인 나쁜 말이 되고 있었다.

싸잡혀서 기분 좋을 사람 없다. 특히나 “내가 오늘 김치를 먹었는데 냉장고 왼쪽 문짝에서 빼먹어서 그런지 맛이 없었어. ‘좌파 김치’ 나빠”와 유사한 수준의 말을 들었을 때라면 더욱 그렇다. 멀쩡한 김치 처지에서야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종갓집 김치인데 어떻게 좌파일 수가 있느냐는 말이 당장 튀어나온다.

 

좌파 말장난에 재미 들인 자들에게 분노의 왼발 공격을

하지만 너는 좌파니까 안 된다는 말에 대응하기 위한,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방어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방어는 애초의 구질구질한 주장을 무력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사상 검증의 악순환을 부채질한다. 실제 당신이 좌파든 우파든 공산당원이든 사민주의자든 파시스트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차피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와 여당이 부채질하고 있는 저 정체불명의 진영 논리에 따르면, 내 편이 아니면 전부 좌파다. 이 허울뿐인 수사 앞에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고백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부조리를 해소하는 데 어떤 효과도 가져올 수 없다.

도대체 내가 좌파여선 왜 안 되나. 좌파라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너는 좌파라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잡음과 논란은 많을수록 좋다. 가져선 안 될 신념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말의 힘이고 마법이다.
최근 입수된 첩보에 따르면 조만간 ‘왼성사모’(왼쪽으로 휜 성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그게 거기로 휘었지만 우리는 좌파가 아니라는 식의 말은 삼가도록 조언해두었다. 안상수 의원을 비롯해 좌파 말장난에 재미 들인 사람들, 정신 못 차리면 언제 어디서 분노의 왼발 공격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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