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제주올레가 있다면 일본에는 시코쿠 순례길(오헨로)이 있다. 제주올레꾼들이 오헨로를 걸었다. ‘길’과 ‘걷기’를 매개로 두 나라 사이에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어느덧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거센 바닷바람은 우의를 무시로 벗어젖혔다. 남국(南國) 시코쿠에서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날씨라고 했다. 일행 중 몇몇은 다시 돌아가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눈치였다. 초청자인 일본인들조차 ‘태어나서 처음 걸어보는 길’이라고 했다.

ⓒ제주올레 제공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시코쿠 가가와 현에 있는 야쿠리지(八栗寺) 경내를 걷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누군가. 300여km에 이르는 제주올레 길을 온몸으로 개척한 ‘올레꾼’ 아닌가. 
흙길이 아닌 콘크리트 길, 그것도 대형 트럭이 굉음을 울리며 질주하는 길은 도보 여행자를 지치게 했다. 그래도 올레꾼들은 묵묵히 눈바람을 뚫고 길을 걸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은 끝에 목적지인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일본인들은 과연 ‘올레 스피릿(spirit)’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3월10일 일본 시코쿠 에히메 현에 있는 구루시마 해협대교 입구. 시코쿠 여행을 활성화하기 위해 설치된 민·관 합동조직인 ‘시코쿠 투어리즘 창조기구’(시코쿠 창조기구)의 초청으로 3박4일 동안 시코쿠를 방문한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첫 방문지는 구루시마 해협대교였다.

아직은 낯선 여행지, 시코쿠

이 대교에서 히로시마 현까지 장장 80km 구간은 9개의 다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이 바닷길에서는 매년 10월경 3일 동안 걷기축제가 열린다. 이날 제주올레 팀이 걸은 구간은 이 중 6km 구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눈바람과 자동차 소음이 걷기를 방해했다. 
일본 측은 이 다리가 시코쿠의 명물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올레꾼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길이 끝날 무렵 나타난 작은 오솔길 한 군데에 마음을 빼앗길 뿐이었다. 오히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한강 다리 중 하나라도 걷기 전용으로 만들면 서울의 명물이 될 것이다”라며 아이디어를 타국의 다리를 건너면서 내놓기도 했다. 천생 올레꾼들은 시코쿠 여행의 첫발부터  걷기의 본령을 놓치지 않았다.    


시코쿠는 섬이다. 규슈·혼슈·홋카이도와 함께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이다. 제주도보다 10배나 큰 섬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아직 낯설다.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 여행 가이드북에도 시코쿠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을 엮어 낸 〈하루키의 여행법〉에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으로 시코쿠 가가와 현이 소개되거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온천이 에히메 현에 있는 도고 온천이라는 것 정도가 시코쿠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다. 글쎄, 우동과 온천이 전부라면 시코쿠 여행은 다른 일본 여행지에 비해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게 아닐까.  
요즘 시코쿠가 ‘은밀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헨로’(お遍路)라 불리는 순례길 덕분이다. 시코쿠 전역에 퍼져 있는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길이다.

 

하루 20~30km씩 장장 1400km를 2개월여에 걸쳐 걷는 대장정이다. 순례자자 88개 사찰을 모두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일본에서는 이미 매년 15만명 이상이 이 길을 걸을 만큼 대중적인 여행 코스다. 지난해 하반기 국내에서도 〈일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 등 관련 서적이 잇달아 출간되기는 했지만, 아직 이 길을 직접 걸어본 한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시코쿠 측에서 제주올레 팀을 초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월19일 시코쿠 창조기구 미조부치 부본부장과 세노 사업팀장은 2박3일 동안 제주올레길을 걸었다. 올레길의 아름다움에 한껏 취한 이들은 귀국하자마자 제주올레 팀을 시코쿠로 초청했다. ‘걷는 길’을 개척해 한국의 여행 문화를 뒤바꾼 제주올레 사무국 전문가로부터 조언을 얻고, 양국 간 걷기여행 붐을 일으켜보자는 취지다.

제주올레와 오헨로는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시코쿠 동북쪽에 위치한 1번 절에서 출발해 섬을 한 바퀴 돌아 88번 절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성산읍 종달리에서 시작해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과 닮았다. 번호(코스)를 따라 도는 게 정석이지만, 거기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같다. 길 구석구석 도보 여행자를 안내하는 방향 표식도 비슷하다(오헨로는 빨간색, 제주올레는 파란색이다). 
오헨로 순례는 지극히 종교적이다. 9세기경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고보(弘法) 대사가 수행한 길을 따라가는 길이어서 그렇다.

닮은 듯 다른 제주 올레와 오헨로

순례자는 삿갓이나 의복 등에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문구를 적어놓고 길을 걷는다. 고보 대사가 함께 동행한다는 의미다. 88개 사찰 완주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지향하는 제주 올레와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 길을 순례하기 시작한 건 이미 17세기부터다. 당연히 길은 대부분 포장도로와 맞닿아 있다. 한적한 오솔길을 주로 걷는 올레길과는 사뭇 다르다. 순례자들 역시 ‘죽기 전에 한 번쯤 고보 대사의 행적을 좇고 싶다’라는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이들이어서 노인이 많다. 자동차를 이용해 손쉽게 순례를 마치기도 한다. 
구루시마 대교를 건넌 그 이튿날, 제주올레 팀이 걸은 순례길 역시 그랬다.

ⓒ제주올레 제공시코쿠 순례자의 옷차림:‘오헨로상’이라 불리는 순례자들은 대개 비슷한 옷차림을 한다. 머리에 삿갓을 쓰고, 흰옷을 입고, 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삿갓은 관 뚜껑, 흰옷은 소복, 나무 지팡이는 묘비를 상징한다. 순례 중에 길에서 죽더라도 누군가 대신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번 절 료젠지에서 순례 장비 세트를 판매하는데, 가격은 1만5000엔으로 꽤 비싸다. 그래서인지 순례자 중에는 평상복에 삿갓만 쓴 이도 많다.

다카마쓰(高松) 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84번 야시마지(屋島寺)와 85번 야쿠리지(八栗寺)는 모두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도록 포장도로가 났다. ‘걷는 길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아니냐’라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여기서 그쳤다면 이번 걷기여행은 다소 실망스러울 뻔했다. 하지만 시코쿠 측은 비장의 카드를 숨겨놓았다. 야시마지에서 야쿠리지로 가는 도중 포장도로를 버리고 바다를 끼고 내려가는 산길을 택한 것. 일본 환경청이 지정한 ‘아름다운 길’인 이곳은 다소 가파르지만, 세토나이카이(???海)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 중간에 앉아 쉴 수 있는 넓은 뜰도 있어 ‘놀멍 쉬멍 걸으멍’ 하기 딱 좋다.          


제주올레 여행자가 현지 식당이며 민박에서 만난 제주할망에게 따뜻한 정을 느끼듯 오헨로 순례자들은 ‘오셋다이’(お接待)를 통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다. 오셋다이는 말 그대로 마을 주민이 순례자에게 베푸는 ‘접대’다. 순례자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100엔짜리 동전을 쥐여주는 식이다. ‘나 대신 오헨로 순례를 잘 마쳐달라’는 의미로 순례자에게 보내는 응원이라 생각하면 된다. 
기자 역시 짧은 시코쿠 여행 중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야시마지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더니 이들이 캐러멜 한 알을 건넨 것이다. 이것이 진짜 오셋다이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코쿠 여행 중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임은 분명하다. 


오헨로 순례를 다룬 책에는 이런 오셋다이 사례가 두루 소개된다.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찻집을 운영하는 이, 귤을 건네는 이, 심지어 공짜 잠자리에 맥주와 안주까지 내는 이도 있다.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 길을 떠난 젊은이든, 직장을 그만두고 인생 2막을 모색하는 중년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기꺼이 타국 순례자를 위해 응원의 오셋다이를 베풀 것이다. 
시코쿠는 과거 제주처럼 유배의 섬이었다. 권력에 의해 좌천된 이들의 귀양지였고, 평야가 적고 태풍이 잦은 탓에 농사 짓기 어려운 불모의 땅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해적, 즉 왜구가 된 이도 많았다. 
지금도 다카마쓰나 마쓰야마 같은 도시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계절에는 막 푸른 잎을 틔우기 시작한 나무와 짙은 갈색의 일본식 가옥이 어울려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쿄 등 대도시에 비하면 물가도 싸고, 오셋다이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난히 순박하고 친절하다.  
시코쿠는 과연 일본의 제주도가 될 수 있을까. 시코쿠 사람들은 내심 제주올레 여행자들이  시코쿠 순례길도 함께 찾아주기를 바란다. 이제 막 일본 열도에 상륙한 제주올레 바람이 시코쿠 순례길에서 어떤 새 바람을 일으킬지 지켜보는 것도 여행자로서 설레는 일이다. 아직은 걷기 좋은 흙길이 아쉽고, 때묻지 않은 자연이 그립기는 하지만 말이다.  


ⓒ제주올레 제공84번 야시마지(屋島寺)로 가는 길에서 만난 아이들. 사진을 찍고 나자 아이들이 호주머니에서 캐러멜을 꺼내 주었다.

시코쿠 순례자의 옷차림
‘오헨로상’이라 불리는 순례자들은 대개 비슷한 옷차림을 한다. 머리에 삿갓을 쓰고, 흰 옷을 입고, 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삿갓은 관 뚜껑, 흰 옷은 소복, 나무 지팡이는 묘비를 상징한다. 순례 중에 길에서 죽더라도 누군가 대신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번 절 료젠지(靈山寺)에서 순례 장비 세트를 판매하는데, 가격은 1만5000엔으로 꽤 비싸다. 그래서인지 순례자 중에는 평상복에 삿갓만 쓴 이도 많다.

시코쿠로 가는 길:
인천공항에서 시코쿠 동북쪽 다카마쓰 공항과 서쪽 마쓰야마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이 있다. 1번 사찰부터 순례하고 싶은 이라면 다카마쓰 공항에 내리는 것이 가깝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도착에서 도쿠시마 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http://www.japaninside.co.kr 등에서 자세한 시코쿠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취재는 시코쿠 투어리즘 창조기구의 후원으로 이뤄졌음을 밝힙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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