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으로 말한다’며 판사는 말을 아끼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사법제도 개선안을 내놓자, 즉각적이고 강한 어조로 반발했다. 대법관이 성명서를 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3월18일 박일환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대법원 브리핑룸을 찾았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성명서를 읽었다. “최근의 이른바 ‘사법제도 개선’ 논의는 사법부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진행방식만으로도 매우 부적절하며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심마저 잃은 이러한 처사는 일류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품격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3월1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로 출근하는 이용훈 대법원장.
대법관과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고르고 고른 단어였다. 판사들은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매우 부적절”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심마저 잃은 처사”…. 판사들이 평소 사용하는 구절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보수적이고 보수적인 판사 수뇌부가 여당에 반발한 것은 사법부 독립이 훼손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판사들은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지방의 한 단독판사는 “판사들이 주요 시국사건이나 형사사건을 맡기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 판사들이 언론과 정치권에 더는 밀릴 수 없다는 내부 기류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대법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PD수첩〉 제작진·강기갑 의원·전교조 조합원 등에 대해 잇따라 무죄판결이 나자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법원을 공격했다. 그러자 이용훈 대법원장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지난 2월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이 대법원장은 “판사 개인의 독단을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 대법원은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등을 조사했다. 3월15일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는 “판사들이 정치적인 단체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지난해 ‘신영철 파동’ 때도 대법원과 한나라당은 한목소리를 냈다. 당시 조윤선 대변인은 “사법부 독립은 법치의 마지막 보루”라는 논평을 냈다. 한나라당은 신영철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도 폐기했다.
 
“검찰 위주 사법개혁안 무식하다”

지난 3월17일 한나라당이 내놓은 사법제도 개선안의 핵심은 법원의 인사 문제다.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24명으로 늘리겠다는 내용도 있다. 이를 판사들은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라고 보고 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법관 인사를 법무장관, 대통령이 하겠다는 이야기다. 대법원장의 고유권한인 법관 인사권을 박탈하겠다는 것으로 헌정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발상이다”라고 말했다. 한 지방의 중견판사는 “법무부에 법관 인사위원회를 둔다는 것은 위헌적 요소다. 정부가 법원을 배제하고 검찰 위주로 사법개혁안을 짜다 보니 좀 무식한 안을 내놓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대법원이 내부 무마용으로 치고 나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지금은 판사들이 조용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사법 파동이 일어날 심각한 사안이다”라고 덧붙였다.

대법관 출신인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판결이 마음에 안 들고 대법원장이 마땅치 않다고 대법원을 뜯어고치자는 거냐. 정부는 사법부를 망가뜨리지 말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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