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에 이어 보건복지가족부가 낙태 근절에 나서면서이다. 여성계는 작금의 일방적인 낙태 논쟁이 여성, 노동자, 10대를 최대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논쟁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구미식 낙태 논쟁이 한국에서도 불붙는 형국이다.


글 싣는 순서

1)낙태 논쟁에 가려진 ‘착취의 트라이앵글’
2)낙태 줄인다고 저출산 극복될까
3)6월 청소년 낙태대란 오나?
4)미국식 낙태논쟁, 한국에서도 불붙나?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지난 2월 불법 낙태 시술 병원 3곳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간 낙태를 둘러싸고 논쟁다운 논쟁이 전개된 일이 없다. ‘프로라이프(Pro-life, 태아의 생명권)’네 ‘프로초이스(Pro-choice, 여성의 선택권)’네 싸워대는 것은 말 그대로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이유는 하나. 국가가 앞장서 낙태를 장려한 역사 때문이었다. 1971년 4.54명이라는 높은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정부가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을 실시한 것이 그 시초였다. 1973년에는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이 제정됐다. 낙태를 가로막던 법의 물꼬를 국가가 앞장서 터준 셈이었다.

이러니 여성계로서는 외국 여성운동 진영처럼 이 문제를 갖고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었다. 산부인과 의사들 또한 낙태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으면서 이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였다. “낙태 찬반 토론 자리에서는 낙태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일상적으로 만나는 내 주위 사람 중에는 낙태한 경험이 있거나 낙태 여부를 고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라고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모순된 현실을 꼬집었다. 낙태를 둘러싼 암묵적인 공모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를 지배한 셈이었다.

그러나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한국젠더법학회장)는 “이제는 우리도 낙태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단 의사 위주, 국가 위주가 아니라 여성을 중심에 놓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여성계가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무조건 “생명은 고귀하다”라고 외치는 프로라이프의사회나, 한때 낙태 장려의 주범이었으면서 이에 대한 사과나 해명 한 마디 없이 낙태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표변한 정부나 결국 여성을 궁극적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여성계에 따르면, 작금의 낙태 논쟁은 세 가지 착취 구조를 은폐한 채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합법 낙태엔 남성 동의서 필요, 불법 낙태엔 남성 책임 빠져

첫째는 성적인 착취 구조이다. 지난 2월27일 한국젠더법학회가 주최한 ‘저출산 시대, 낙태를 처벌해야 하나’ 세미나에 참석한 김은애 홍익대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원치 않는 임신을, 여성이 과연 혼자 하는 것인가’ 먼저 반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흔히 낙태를 비난하는 이들은 ‘문란한 성 관계’가 원치 않는 임신을 낳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하다못해 여성이 피임을 요구할 ‘성적 측면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제대로 갖고 있느냐고 김씨는 되묻는다. 2005년 복지부가 고려대 의대에 의뢰한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혼 여성 낙태는 연간 19만 건(58%), 미혼 여성 낙태는 14만 건(42%)으로 기혼 여성 낙태율이 더 높다. 기혼 여성도 이렇게 피임에 실패하는 것이야말로 성 관계에서 여성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김씨는 지적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대부분의 책임은 여성에게 돌아간다. 낙태를 선택하건, 낳아 키우는 쪽을 선택하건 마찬가지다.

법적인 면에서도 여성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위치에 있다. 낙태를 일부 허용한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 시술 시 배우자(남성)의 동의를 반드시 구하도록 정하고 있다. 반면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형법에서는 불법 낙태 적발 시 형사 처벌 대상을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합법적이어서 도덕·윤리적으로 흠이 발생하지 않을 만한 부분에서는 남성을 끌어들이면서, 반대로 불법적인 부분에서는 비도덕성·비윤리성에 대한 비난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덮어 씌우는” 가부장적 구조가 온존하고 있다고 김은애 연구원은 지적했다.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한 산부인과

두 번째는 계급적 착취 구조이다. 정진희씨(경상대 사회학 박사과정)는 “낙태 단속은 못사는 여성들에게 특히 심각한 타격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녀에 따르면, 설사 낙태가 완전히 금지된다 해도 부유한 여성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입증된다. 전 세계에서 무면허 낙태 시술을 받다 죽은 여성 중 지배계급 여성은 거의 없다. 이웃나라로 원정 낙태를 가는 따위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1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는 여성들에게 낙태 단속은 ‘살 떨리는 공포’라고 정씨는 말한다. 따라서 저임금은 기본이고 비싼 전월세, 높은 양육비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지속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여성들에게 낙태권은 자신뿐 아니라 빈곤에 시달리는 가족 성원의 삶을 지키는 문제이기도 하다”라는 정씨는, 그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이 낙태 반대론자들의 공세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9년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총연맹이 낙태권을 주장하는 8만여 명의 시위를 이끌기도 했다는 것이다. 3·8 세계여성의날 공동기획단에 속한 최미진씨는, 저출산 현상으로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이 위기에 처하자 낙태에 대한 공격이 거세진 것 또한 낙태 논쟁의 계급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자살률 1위부터 바로잡으라"

낙태 논쟁이 은폐한 세 번째는 세대간 착취 구조이다. 이번에 정부는 낙태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임신·출산 청소년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미혼모·미혼부에게 월 12만4000원 지원금을 주는 방안 등을 밝혔다. 그렇지만 아직은 임신한 10대가 계속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습권 문제마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서정애 인구보건복지협회 조사연구실장의 지적이다. 임신한 것이 알려진 10대는 퇴학을 강요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10대에게 무조건 아이를 낳으라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박현이 부장은 지적했다. 이는 10대를 불법적이고 위험한 낙태로 내모는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20대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박 부장은 최근 20대 여성으로부터도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고 말했다. 낙태 단속이 강화되다보니 다급해진 20대가 청소년 상담기관에까지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일 24개 여성단체가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 자신에게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현재의 낙태 논쟁은 여성·노동자·10대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윤상 소장은 국가가 생명을 생명답게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생명은 소중하니 무조건 낳으라’는 식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나아가 지나친 입시 경쟁 때문에 목숨을 끊는 10대, 생활고 때문에 자살하는 서민,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어 목숨을 끊는 노인들이 넘쳐나는 나라가 과연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냐’고 되묻기도 했다. 생명권에는 태어날 권리뿐 아니라 태어나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는데, 이런 사회가 태아에게 ‘숭고한 삶’을 약속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 사회적 공론화도 이루어지기 전에 낙태를 단속하겠다며 여성들을 막다른 길로 몰기보다 사회 구성원에게 ‘숭고한 삶’을 보장할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국가가 먼저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양현아 교수 또한 ‘저출산 시대, 낙태를 처벌해야 하나’ 세미나에서 낙태 논쟁의 주춧돌이 처음부터 잘못 놓였다고 비판했다. 지금은 낙태를 처벌할 것인가 말 것인가보다, ‘왜 낙태를 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낙태를 하게끔 만드는 사회경제적 현실을 바꿔나가는 데 사회적 고민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