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거의 거식증에 가까울 정도로 밥을 안 먹던 시기가 있었다. 학교에 싸간 도시락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돌아오기 일쑤였다. 나는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가 놀기 바빴다. 그때 나랑 거의 동시에 뛰어나가던 친구가 있었다. 결막염 기가 있었는지 늘 노란 눈곱을 달고 다니던 녀석이었는데 노상 나처럼 점심을 걸렀다. 내가 가끔 도시락을 까먹을 때에도 그 친구는 먼저 밖으로 나가 놀곤 했는데, 당시에는 그걸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집안사정 때문에 도시락을 못 싸오는 친구가 있으리라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은 “밥도 못 먹고 학교 다녔다”라는 아버지의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은 벌어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벌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친구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고, 정말로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못 되어서 늘 점심을 굶었다고 한다. 충격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아니고, ‘6·25전쟁’ 때도 아닌데 가난해서 밥을 못 먹는 어린이가 있다니! 아마 그때 처음으로 나는, 우리나라가 막연히 생각하던 것만큼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무상급식’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지난해에는 경기도의회에서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 주도로 무상급식 예산이 전액 삭감된 사실이 밝혀져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게 대체 무얼 의미하는가. 무려 20여 년이 지난 2010년에도 여전히 한국에는 점심을 굶는 아이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인민들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냐”라며 남조선으로 넘어온 황장엽씨가 한마디 할 법도 하다. “아이들 밥 굶는데 무슨 선진 일류 국가냐!”

무상급식은 진보 정당과 일부 시민단체의 외로운 노력을 통해 차츰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서, 지금은 시민 대다수가 무상급식에 찬성하며 한나라당 일부 국회의원조차 원칙적 찬성을 표시하고 있다. 김진표 교육부총리-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돈 없다’며 무상급식을 격하게 반대했던 참여정부와 당시 열린우리당은 야당이 된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 전향적이다.


부유층 어린이도 예외여선 안 되는 게 핵심

물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주류, 극우 언론들은 여전히 무상급식 논의를 ‘사회주의’ ‘포퓰리즘’ 같은 단어를 동원해가며 공격하고 있다. 사뭇 합리적인 체하며 반대 논리로 내세우는 주장이 가관이다. “부유층 자녀들에게 무상급식하는 건 형평에 어긋나고 예산낭비다”라는 것. 이것 참,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것일까. ‘예산낭비’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곳은 바로 ‘희대의 삽질’ 4대강 사업이 아닌가. 하지만 어찌 보면 이들의 어깃장은 매우 중대하고 민감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부유층 자녀도 예외여선 안 된다는 게 바로 무상급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 등이 디자인해 제시하는 무상급식 공약의 바탕이 되는 철학은 민주주의의 원리 그 자체다. 모든 시민에게 예외 없이 ‘1인 1표’ 원리가 적용되듯, 기본권인 생존과 건강에 직결되는 학교급식 역시 예외 없는 보편적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은 낭비되지 않을 것이며 형평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부유층에게서 그만큼 세금을 더 거두면 되니까. 그리고 바로 그것이 ‘부자 정당’과 극우 언론이 기를 쓰고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이유이며, 무상급식 논의가 생각보다 훨씬 첨예한 전선을 형성하는 이유다.

기자명 박권일 (〈88만원 세대〉 공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