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언론사에서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3·1운동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했다. 전국 초·중·고생 3919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 결과 40%의 학생이 3·1절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의미는 제쳐두고 3·1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조금 알고 있다’가 39.6%였고 ‘전혀 모른다’와 ‘잘 모른다’가 16.8%였다.

며칠 후 이명박 대통령(사진)이 3·1절 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기념사는 다소 재미있는 층위에서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다름 아닌 대통령의 특이한 역사 인식 탓이었다. 그는 3·1운동의 정신이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생산적인 실천방법을 찾는 중도실용주의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낡은 이념의 틀과 대립, 갈등으로 분열돼서는 선진화의 길을 갈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일제 강점기에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생산적인 실천방법을 찾으려 했던 중도실용주의 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주관식 문제에 ‘3·1운동’이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5000만 인구 가운데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의미를 독립이나 민족이 아닌 중도실용주의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던 흥미로운 해석임에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세종시 수정안 문제를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은 뉴스 앵커도 아는 것이었다.

이 전례 없이 독창적인 대통령을 두고 딱히 역사의식의 부재라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중도실용이라는 국정철학이 사실 어떤 실체도 없이 정권이 하고자 하는 일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때 인용되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이 마법의 수사만 있으면 엄연히 다른 사실관계도 사실처럼 된다. 이를테면 낡은 이념 틀에 맞추어 대립과 갈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현 정권인데도, “그렇게 분열돼서는 선진화될 수 없다”라는 말을 백치 같은 얼굴로 호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정권에서 중도실용이라는 말의 쓰임은 ‘에지’나 ‘잇’ 따위 단어의 과잉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특정 뉘앙스를 위해 가져다 붙이는 수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바야흐로 실용의 이름 아래 고등교과 정규과정에서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전환되고 그 시간에 영어교육을 하는 시대다. 역사 따윈 몰라도 된다. 혹시 아는가. 중도실용 한 번만 더하면 다음 초·중·고생 설문에선 ‘3·1운동 정신은 에지에 있다’는 답변이 나오게 될지.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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