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 9시, 뉴스 볼 시간이다? 아니다, 어떤 이들에겐 세계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텔레비전 리모컨을 비행기 삼아 목적지를 찾는다. 뉴스를 지나 드라마를 건너 착륙한 곳은 EBS 〈세계테마기행〉. 자연의 풍광과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 그곳에서, 시청자들은 잠시 현실을 잊고 ‘가상’ 여행을 즐긴다.

시청자들 대신 해외로 여행을 떠나주는 여행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에서 별로 참신한 소재가 아니다. 일반 시청자 직접 촬영해 보내온 영상으로 해외 여행지를 소개하는 KBS 〈세상은 넓다〉가 199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PD 혼자 기획, 촬영, 편집, 원고 작성을 도맡아 진행하는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도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얻고 있다. 주로 오지를 탐험하는 KBS 〈도전!지구탐험대〉와 음식을 통해 각 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MBC 〈요리보고 세계보고〉도 한 때 전파를 탔다. 

ⓒEBSEBS 〈세계테마기행〉(사진)을 보는 시청자는 ‘여행 큐레이터’를 통해 실제 여행을 다니는 듯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세계테마기행〉은 지난 2월15일 ‘미국 남부 기행-1부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로 꿋꿋하게 400회를 맞았다. 그간 미국․중국․유럽․동남아처럼 여행지로 이미 익숙한 곳은 물론 튀니지, 마다가스카르, 그루지야, 불가리아, 솔로몬 제도, 벨리즈, 가이아나처럼 생소하고 정보가 적은 곳도 다녀왔다. 여행지 한 곳을 다녀온 기행 영상을 40분짜리 4편으로 나눠 월~목요일에 방송하니, 제작팀이 발 디딘 여행지로 치면 100곳을 기록한 셈이다. 〈세계테마기행〉의 평균 시청률은 2~2.5%. 그 절반에 못 미치는 EBS 프로그램 전체 평균 시청률에 비하면 ‘대박’ 프로그램이다.

〈세계테마기행〉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방향을 잘 잡았다. 2008년 초 방송을 준비하던 EBS 김형준  PD는 서점에 가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책꽂이에 꽂힌 여행 서적들 가운데 여행 정보를 전달하는 실용서보다는 개인 여행기를 담은 수필집이 더 많더라.”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김 PD는 여행지로 떠난 카메라 앞에 사람을 세웠다. 바로 ‘여행 큐레이터’라고 불리는 여행 안내자이다.

이제껏 〈세계테마기행〉에 참여한 여행 큐레이터는 소설가 김영하, 영화평론가 이동진, 사진작가 유별남, 연극배우 오광록, 가수 손병휘, 시인 김용택, 화가 최수진, 요리사 구본길, 소설가 은희경, 건축가 김원철, 만화가 이우일 등 100여명이 넘는다. 주로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여행자로 내세워 카메라가 그의 등을 좇는 형식으로 〈세계테마기행〉은 흘러간다. 영상과 함께 흐르는 내레이션도 큐레이터가 직접 읽는다. 시청자 대신 여행을 떠나주는 역할을 맡은 큐레이터를 선정하는 기준은 ‘방송 친화성’.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보름 가까이 카메라 앞에서 씩씩하게 여행을 다니려면, 카메라를 무서워하지 않고 체력이 좋고 또 ‘잘 웃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테마기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큐레이터와 여행지의 궁합이다. 다들 강한 개성을 지닌 문화예술인들이니, 그 빛깔에 어울리는 여행지에 데려다 놓으면 인물과 여행지가 동시에 빛이 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찍은 피지의 작은 무인도 모누리키 섬에 가, 영화 속 톰 행크스처럼 작살로 물고기를 잡고 배구공 ‘윌슨’을 친구 삼아 하룻밤을 보냈다(2008년 8월4~7일 방송, ‘이동진이 찾은 남태평양’).

또 어릴 때부터 파블루 네루다의 시를 무척 좋아했던 소설가 성석제는 칠레로 떠나 네루다가 즐겨 찾았던 식당에서 네루다가 즐겨먹었던 음식을 시켜먹고, 네루다가 살았던 집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네루다의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자신의 ‘로망’을 실현시켰다(2008년 4월23~26일 방송, ‘성석제의 칠레 종단’).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 중이거나(〈세상은 넓다〉〈걸어서 세계 속으로〉), 종영한(〈도전! 지구탐험대〉〈요리보고 세계보고〉) 여행 관련 프로그램들. 각기 고유한 특색이 있다.
여행이 ‘창조’를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다. 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그리스로 데려다놓았더니 바쁜 일정 와중에 이곳저곳을 크로키 작품으로 남겼다.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 화가와 마주앉아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했다(2009년 3월10일 방송, ‘박재동 화백의 야사스 그리스’). 싱어송라이터 정지찬은 시베리아 땅 9288㎞를 열차를 타고 횡단하는 동안, 침대칸에서 새 앨범 〈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에 수록할 음악 3곡을 만들었다(2008년 4월7~10일 방송, ‘9,288km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이런 여행 큐레이터의 모습을 비추면서, 〈세계테마기행〉은 여행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구실도 톡톡히 한다.

가끔은 유명한 문화예술인이 아닌 일반인이 프로그램을 빛낼 때도 있다. 지난해 8월, 〈세계테마기행〉은 시청자 여행 큐레이터를 모집해 320팀 가운데 두 팀을 선정했다. 과거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고려인들의 영정 사진을 찍어주는 봉사활동을 했던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고(2009년 8월17일, ‘톈산 너머의 낙원, 키르기스스탄’), 혈기왕성한 대학생 세 명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3개국을 ‘온종일 걸어다니면서’ 여행했다(2009년 8월24~27일, ‘세 친구의 배낭여행, 인도차이나 3국을 가다’). 

〈세계테마기행〉은 외주 제작사 네 곳이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촬영을 2주 안에 끝내고 가편집 기간 2주를 거쳐 종합편집․녹음 1주까지 더하면 금세 방송 날짜가 다가온다. 특히 2주간의 짧은 여행으로 ‘보는 사람이 즐거운’ 40분짜리 여행기 4개를 찍어내려면 만드는 PD 입장에선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페루․브라질․루마니아․캄보디아 등 12개국을 다녀온 김진혁공작소 탁재형 PD는 “제작진 스스로 여행의 ‘의외성’을 즐기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라고 말했다. 취재가 안 풀리고 온갖 사기꾼들만 접근해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누군가 불쑥 카메라 촬영에 끼어들어 말을 걸었을 때 “아, 얜 또 왜 이래”라고 귀찮아하면 현지인들 삶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촬영이 산으로 가고 있다’라고 느낄 때 오히려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불쑥’, ‘난데없이’, ‘의외로’, ‘계획에 없이’, 이런 것들이 바로 여행의 참맛인 까닭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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