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한나라당 피로증’에 걸렸다. 4년 전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과 25개 구청장 모두를 한나라당에 몰아줬던 서울이지만 지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18대 총선 이후로는 정당 지지율이 무색하게 선거만 치르면 연전연패하며 ‘선거 민심’을 체감한 한나라당은, 심혈을 기울인 초대형 내부 여론조사에서도 비관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실시한 서울시장·구청장 여론조사 결과를 〈시사IN〉이 단독 입수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2월5~8일 실시한 서울시장·구청장 평가 여론조사 문건. 기초단체장 공천에 무시 못할 변수가 될 전망이다.

여의도연구소는 지난 2월5일부터 8일까지 나흘에 걸쳐 오세훈 서울시장과 각 구의 현직 구청장 경쟁력에 대한 자동응답전화(ARS)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서울시 유권자만을 대상으로 했는데도 응답자가 5만9684명이나 되는 초대형 여론조사였다. 서울시내 48개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각각 1000명이 넘는 표본을 조사해 한데 모은 것이다. ‘1000명’은 서울시는 물론 전국 여론조사로도 적다고 하기 힘든 숫자다. 한 서울지역 한나라당 의원은 “표본오차가 겨우 ±0.4%다.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지난해 12월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시사IN〉의 서울시장 여론조사 표본오차가 ±3.1%이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조사가 얼마나 이례적인 규모인지를 알 수 있다.

 

한나라당, 6만명 대상 초대형 여론조사 벌여

조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오세훈 서울시장 평가, 서울 각 구의 구청장 평가, 세종시 관련 의견(상자 기사)이 그것이다. 현직 시장·구청장 평가는 “현직이 다시 출마한다면 지지할 것인가”를 묻는 재신임 평가 방식이었다. 단순 지지도를 묻거나 후보 간 가상대결을 하는 방식이 상대적 경쟁력을 묻는 것이라면, 재신임 평가는 현직 후보 자체의 경쟁력을 보여주기 위한 조사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재신임 평가에서 지지 응답이 다소 낮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지지 응답보다 거부 응답이 1.5배 이상으로 나오거나 지지 응답이 30%를 밑돌면 일단 위험신호로 본다(위 그림에서 순위표가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이에 해당한다).

오 시장 평가는 앞으로 불붙을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의 큰 변수가 될 수 있고, 각 구의 구청장 평가는 한나라당 공천 심사의 중요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폭발력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이 조사 결과를 대외비로 분류했다.

이 자료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구청장들의 ‘성적표’다. 중앙정치의 논리와도 긴밀히 엮여 있어 변수가 매우 많은 서울시장 경선과는 달리, 한나라당의 구청장 후보 공천은 이 자료에서 드러난 경쟁력 평가에 크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시 25개 구청 중에는 3선을 채워 연임이 불가능한 구가 3곳(용산구·은평구·동작구), 구청장이 구속되는 등의 이유로 권한대행체제인 구가 3곳(동대문구·서대문구·관악구) 있다. 현직 구청장의 재선 도전 가능성이 있는 구가 19개인 셈이다. 이 중 강동구가 민주당 소속 구청장, 양천구가 무소속 구청장일 뿐 나머지 17곳 구청장은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25개 구를 석권했던 덕에, 한나라당은 선거 이후 5명의 구청장을 잃고도 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나라 구청장, 절반 이상 ‘적신호’

하지만 이번 조사 결과는 한나라당이 ‘2006년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에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예상보다도 더, 성적표가 험악하다. 재선 도전이 가능한 한나라당 구청장 17명 중 10명이 재지지 응답 30%를 밑돌았다. 또 이들 10개 구에서는 모두 재지지 거부 응답이 재지지 응답보다 1.5배 이상 많았다. 도봉구·종로구·강북구는 거부가 지지보다 2배 이상 많았는데, 도봉구·금천구·강북구는 거부 응답이 50%를 넘었다. 한나라당 구청장 17명 중 지지 응답이 정당 지지도(39.6%, 같은 조사)를 웃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가장 근접한 중랑구청장이 36.7%를 기록했다.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인 강동구청장은 지지 36%, 거부 37%로 재지지율 전체 2위에 올랐다. 역시 유일하게 무소속인 양천구청장은 지지 31.9%, 거부 43.1%로 중상위권이었다.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들의 성적표가 워낙 나쁘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非) 한나라당 구청장 두 명의 성적표가 두드러져 보인다.

재지지율 기준으로 보면 중랑구, 강동구, 노원구, 중구, 구로구 순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래에서부터 보면 도봉구, 종로구, 강남구, 강북구, 영등포구 순서로 평가가 나빴다. 한나라당의 ‘본진’ 격인 강남구에서 지지 응답이 많지 않은 게 눈에 띈다.

이 조사 결과는 서울지역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원외 당협위원장에게, 각자의 지역 결과만 따로 떼어 전달됐다. 국회의원과 원외 위원장 48명 중 적잖은 이들이 이 자료를 받고 고심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장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구청장 후보 교체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 지역의 구청장이 하위권을 기록한 것을 본 한 의원은 “사실 구청장 후보는 별생각 없이 현직으로 가려 했는데, 조사 결과를 받고 보니 머리가 복잡해지더라”라고 말했다. 구청장 등 기초단체장 공천은 공식적으로는 객관적 경선을 표방하는 곳이 많지만, 적지 않은 경우 해당 지역구 의원의 ‘낙점’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 사실상의 공천권자인 국회의원들이 이번 조사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한나라당에 대규모 구청장 공천 물갈이 바람이 불 수도 있다.

“오세훈 비토” 48.2%
 
함께 조사된 오세훈 서울시장 재지지 조사 결과 역시 한나라당 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오 시장은 6만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재출마 지지’ 39.4%, ‘바꾸는 것이 낫다’ 48.2%라는 조사 결과를 받아들었다. 당장 한나라당 내에서 분분한 해석이 쏟아져나왔다. 오 시장과 경선에서 경쟁할 원희룡 의원 캠프와 가까운 한 인사는 “오 시장에게 나쁠 게 없는 숫자다. 구청장들의 성적표에 견주면 잘 나온 편이다. ‘오세훈 개인 브랜드’는 먹힌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고 경계했다. 재지지율이 정당 지지도 수준에서 버텨준 데다 지지 응답과 거부 응답의 비율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왼쪽 두 번째)은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차기 시장 선두주자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절반 가까운 ‘거부층’은 부담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인사는 “재지지율(39.4%)과 정당 지지도(39.6%)가 그게 그거라는 건 오히려 ‘오세훈 브랜드’가 별것 없다는 의미다. 구청장 선거와 달리 서울시장 선거는 정당 충성도가 크게 작동하는데, 그런 선거에서 정당 지지도 이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한다는 건 구청장 선거와 의미가 다르다”라고 반박했다. 그 역시 또 다른 포인트를 덧붙였다. “조사를 보면 20대에서 40대까지 오 시장 ‘비토층’이 절반을 넘긴다. 50대 이후에야 반전이 되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나라당 지지층과 겹친다. 하지만 오 시장은 무당파와 젊은 층의 지지로 시장이 됐고, 디자인 서울이니 한강 르네상스니 하는 시정 역시 젊은 층 눈높이다. 오 시장 재지지율은 전통적 한나라 지지층이 결집한 것일 뿐 ‘오세훈 브랜드’는 고갈된 걸로 봐야 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평가는 어떨까. 미디어리서치 김지연 상무는 “재지지율 조사는 원래 ‘바꾸자’는 의견이 더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재지지 39.4%가 나쁜 숫자는 아니다. 다만 정당지지율도 거부 응답도 꽤 높은 게 변수다. 낙제는 확실히 아닌데, 애매한 숫자다”라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윤희웅 정치사회조사팀장 역시 재지지율 수치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오 시장에게 더 비관적으로 읽었다. 48.2%라는 ‘비토층’을 크게 본 것이다. “응징하기 위한 투표는 좋아서 하는 투표보다 투표장까지 갈 유인이 훨씬 크기 때문에 비토층이 절반 가까이 되는 건 엄청난 부담이다. 그 대부분이 ‘반MB’ 층이라면 오 시장이 위험하다. 하지만 여기에 한나라당 지지자면서 ‘반 오세훈’ 성향의 응답자가 어느 정도 섞여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변수가 있다.”

이번 한나라당 여론조사 결과는 ‘구청장 빨간불, 오세훈 노란불’로 요약된다. 흡인력 있는 야권 후보가 없는 탓에 드러나지 않았던 광범위한 ‘한나라당 피로증’이 오히려 한나라당 자체 조사로 확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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