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봄비가 내리던 날, 정미영씨(경남 합천군 대양면)는 비닐하우스에 있었다. 3월 초 개학과 더불어 학교 급식용으로 납품할 토마토를 손보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무농약으로 정성 들여 기른 토마토·양상추 등은 두 자녀가 다니는 대양초등학교를 비롯해 합천군 내 38개 학교의 급식 재료로 쓰인다. 2008년 경남교육청이 친환경 무상급식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변화이다. 
 
경남 무상급식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경기도였다. 급식운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경남·전북·제주 등은 친환경 무상급식의 모범 지역으로 꼽혀왔다. 그런데 경기도에서 불거진 무상급식 갈등이 색깔 논쟁으로까지 치달으면서 경남이 관심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김태호 경남도지사를 비롯해 20개 시·군 단체장 중 17명, 도의원 52명 중 42명이 여당 소속인 이 한나라당 텃밭에서 어떻게 무상급식이 가능했는지에 대중적 관심이 쏠린 것이다.
 

지역에서 난 고추로 직접 장 담그기를 체험하는 경남 합천초등학교 학생들

무상급식은 2007년 12월 당선된 권정호 현 경남교육감의 대표 공약 중 하나였다. 진주교대 총장 출신인 권 교육감은 무상급식 전면 확대, 공립형 대안학교 설립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당시 무명에 가깝던 그가 현직 교육감을 이긴 배경을 둘러싸고 해석이 분분했다. 전교조가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지원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전교조나 권 교육감은 이를 부인했다. 취임 이후 권 교육감이 진보 진영과 협력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었다. 경남급식연대 진헌극 집행위원장은 “권 교육감이 의지를 갖고 친환경 무상급식을 추진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그 밖의 교육 정책은 결코 개혁적이라 평가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특목고 설립을 적극 추진하는가 하면 일제고사 실시, 시국선언 교사 징계 등 ‘MB식 교육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더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권 교육감 취임 초기, 도 교육위원회에서 무상급식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 진보 쪽이었다는 점 또한 역설적이다. 전교조 교사 출신이면서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박종훈 교육위원은 무상급식이 학교급식법상 식품비 수익자 부담 원칙 등을 위배하는 면이 있고, 막대한 예산 부담으로 인해 무상급식을 현실화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로 인해 경남교육청은 교육과학기술부에 법령 질의를 의뢰해 무상급식이 위법이 아니라는 회신을 받기도 했다. 오는 6월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는 박종훈 위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무상급식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무상급식은 지자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이며, 무상급식이 자칫하면 급식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남에서의 무상급식 논쟁은 경기도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돼왔다.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교육감 선거 공약 치다꺼리를 왜 자치단체장이 해야 하느냐, 다른 교육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니냐. 이런 문제 제기가 경남에서도 쏟아졌지만 ‘무상급식=저급한 포퓰리즘’(김문수 경기도지사)이라는 식의 정치 공세가 가해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파문 이후 얘기가 달라졌다. 지난해 국감에서 권 교육감은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으로부터 “가정형편에 관계없이 무조건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데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다”라는 질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권 교육감은 “무상급식은 헌법상 의무교육의 실현이다”라고 답했다. “그런 논리라면 잘사는 집 애들한테는 책 값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밥 먹는 것도 교육의 연장이며 그런 점에서 초ㆍ중학생 무상급식 정책은 계속 추진하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농어민신문경남친환경급식지원협회 소속 농민들이 급식에 쓸 농산물을 선보이고 있다.

이군현 의원식 잣대를 들이대자면 경남에는 교육감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발상을 지닌 단체장이 우글대는 셈이 된다. 기초 단위 자치단체일수록 더 그렇다. 최근 김해연 경남도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급식비 대비 자치단체 지원 비율이 높은 지자체는 합천군(47.8%), 남해군(39.6%), 의령군(30.7%), 하동군(27.3%) 순서였다. 실제로 경남 10개 군의 경우는 이미 초·중학교 100%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중 합천·남해·하동·의령 4개 군은 초·중학교 외에 유치원과 고교까지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겠다고 선포한 상태이다.  이에 비해 10개 시 단위 지자체의 지원 비율은 평균 8.7%에 그쳤다.
 

무상급식은 권정호 교육감(위)의 선거 공약이었다.

권 교육감은 당선 직후 교육청과 지자체가 급식비를 분담해 지원하는 모델을 제시했다. 종전에 학부모들이 학교 급식과 관련해 부담하던 운영비·인건비·식재료비 중 운영비·인건비는 교육청이, 식재료비는 지자체가 대신 부담하는 모델이었다. 그런데 지자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보니 지원액과 지원 비율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교육청과 지자체가 각각 62%, 38% 비율로 급식비를 지원한 경남도는 올해 이 비율을 5:5로 맞춘다는 계획이다.

교육청과 지자체 역할 분담이 가능했던 것은 무상급식이 아이들 건강뿐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권 교육감은 지역에서 난 농산물, 그중에서도 친환경 농산물을 사용하면 안전하고 질 높은 급식을 제공할 수 있을뿐더러 지역 농가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단체장들을 설득했다. 도 교육청 관계자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행정구역 통폐합이 하드웨어적인 통합이라면 학교급식을 매개로 한 지역사회의 연계는 소프트웨어적인 통합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무상급식을 시행하게 된 학교들이 공동구매·직거래 등을 시도하면서 생산자(농민) 조직도 활기를 띠었다. 정미영씨는 “그전에는 무농약 쌀·채소 등을 생산하는 40여 농가가 한살림 등 인근 도시 생협 조직과 주로 거래를 해왔다. 그런데 무상급식으로 거래처가 확대되면서 친환경 농사를 짓겠다는 농가가 크게 늘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정씨가 총무를 맡은 ‘안전한 학교급식을 위한 합천생산자위원회’에는 5개 면 200여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경남교육청이 개발한 표준식단 지침서가 보급되면서 생산자와 연계한 맞춤형 생산 체제 또한 정비되는 중이다. “표준식단을 기초 삼아 우리 학교 특성에 맞게 식단을 짠 다음 거래 농가에 미리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한다”라는 합천초교 영양교사 김미경씨는 이 과정에서 지역 생산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 무상급식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학교 쪽에서는 ‘합천에서 나지 않는 무농약 당근을 직접 재배해줄 수 없느냐’고 지역 농가에 묻고, 농가에서는 ‘이번에 양배추가 남아도는데 이를 식단에 반영해줄 수 없느냐’고 학교에 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역사회 분위기도 달라졌다.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자기가 먹는 쌀이 누구네 집에서 생산한 것인지를 안다. 합천생산자위원회는 3월부터 유기농 표고버섯을 학교에 납품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먹일 건데  좀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물건을 건네고 싶다”라며 버섯 농가가 결합한 덕분이다. 합천군은 지난해 친환경 급식예산으로 지원한 17억원 중 6억원가량이 지역 농산물을 사들이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 같은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와 더불어 인구 이탈을 막은 것도 무형의 성과라고 군청 관계자는 자평했다. “무상급식과 방과 후 학습비 지원 등에 대한 군민 반응이 기대 이상이다. 교육 때문에 농촌을 떠나겠다는 사람은 없게 만들겠다는 정책이 통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도 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6월 선거에 출마할 어떤 후보든 무상급식을 없애겠다고 했다가는 돌을 맞을 분위기다”라고 전했다. 경남에서는 무상급식이 이미 ‘색깔’이 아닌 ‘생활’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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