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직장에서 ‘별’이라 불리는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리더)들의 삶은 우리네랑 많이 다를까. 성격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승승장구했다고 해도 적어도 20년 이상의 쉽지 않은 시간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니, 그런 궁금증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정신과 전문의)는 국내에서 기업 임원들의 ‘속내’를 가장 많이, 가장 심층적으로 들여다본 정신건강 전문가이다. 지난 5년간 심층 심리분석을 기반으로 한 자기 성찰 프로그램 SE(Self-Encounter)를 통해 500여 CEO와 임원을 1대1로 심리 검사하고 심리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치유 세션을 진행하면서 그는 그들에게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의 과학적인 ‘임상 결과’를 토대로 기업 리더들의 독특한 자아 성찰 무늬를 살펴본다.   

ⓒ마인드프리즘 제공리더들의 심리 분석은 맨 먼저 그림 그리기, 질문에 답하기, 사진을 보며 연상되는 것 말하기 같은 15가지 검사(위)로 시작한다.
‘SE 프로그램’으로 마음을 찍다 어느 화창한 날 오전. ㄹ그룹의 강 아무개 부사장이 마인드프리즘을 찾았다. 심리 검사에 맞게 설계되었다는 조용한 공간에서 차 한잔을 마신 뒤 그는  심리검사를 담당하는 검사MA(Mind Analyst)와 함께 네 시간 동안 여러 검사를 받았다. 나무와 집 그리기, 데칼코마니 모양의 다양한 카드 보고 말하기, 뒤죽박죽 6컷짜리 만화 순서 맞추기, 특이한 문양 따라 그리기, 문장 이어가기 같은 과제는 즐겁고 재미있었다.

2주 뒤 강 부사장은 다시 그곳을 찾아 창으로 대나무가 내다보이는 방에서 정혜신 대표를 만났다. 120분간의 긴 면담. 막연히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심리 MRI’를 찍은 것 같은 심리분석 결과를 중심으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가슴이 뻐근했다.

정 대표는 SE를 통해 파악한 그의 ‘심리적 DNA’를 설명하면서 강 부사장이 분노를 잘하고, 때때로 조울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정 대표는 그의 성격 특성을 이야기한 뒤, 왜 자주 분노하고 우울해지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강 부사장은 깜짝 놀랐다. 자기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것이다. ‘내 안의 나’는 기업 임원으로서 당당하고 위압적인 그와 많이 달랐다. 

정 대표는 그 같은 결과를 도출해낸 심리 분석 방식을 ‘SE 프로그램’이라 소개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분석하고 돌보는 ‘심리 경호’ 프로그램. 혹은 마음을 찍는 ‘심리 MRI’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여러 심리 상황을 분석하고 근본 문제를 파악해 새로운 자아에 눈뜨게 만든다”라고 정 대표는 덧붙인다. 기업 리더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진단 기법은 그녀와 수많은 전문가 집단이 지난 2년여 동안 개발한 ‘세계에 단 하나뿐’인 1대1 심층 심리분석 프로그램이다. 

리더들은 강하다, 그러나…
500여 기업 리더의 심리분석 결과를 종합해보니 몇 가지 의미 깊은 공통점이 나타났다. 일단 주관적 스트레스 지수가 일반인보다 낮았다(주관적 스트레스는 본인이 감지하는 스트레스를 말한다. 객관적 스트레스는 본인이 직접 겪는 스트레스의 일반적인 강도를 말함). 스트레스는 높은데 그 사실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리더가 많았다는 뜻이다. 10명 중 4.5명은 의학적으로 주의·경고를 받을 만한 수준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스트레스 인내력이 상당히 뛰어난 거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위험에 비교적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스트레스 민감도가 떨어지면 건강에 안 좋다. 자기 보호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기 쉽다”라고 정 대표는 말한다. 물론 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평소에는 안녕한 듯싶다가, 이직이나 퇴임 같은 신상 변화가 나타나면 일시에 폭발하듯 나타난다. 

리더들은 자아 강도(외부 압력과 변화에 대응하는 심리 내적 힘)와 자기 통제력도 엄청났다. 어려운 환경과 압박을 돌파하는 힘은 보통 사람의 5배나 되었다(놀랍게도 무려 11배나 되는 리더도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명박 대통령이 “나도 한때는” 하며 과거사를 자주 자랑하곤 하는데, 기업의 리더들도 대부분 그 정도의 ‘빵빵한 과거사’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 대표는 “이는 성공이 자기 억압의 결과물임을 뜻한다”라고 설명한다. 에너지 몰입을 극단적으로 한 덕에 강건해지고 성공했다는 해석이다.

혼란을 겪는 리더들 리더들의 성격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부끄러움일지 모른다. 정 대표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 CEO와 임원들은 어릴 때 부끄럼을 많이 탔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 시간에 일이나 생각을 나 홀로 정리하는 ‘훈련’도 자주 했다. “그 덕에 리더들은 자기 컨트롤에 능하고, 비교적 쉽게 승진할 수 있었다”라는 게 정 대표의 진단이다(그러나 부끄러움은 리더가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라진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리더 대부분은 자신이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실제 몇몇 40, 50대 CEO는 자신은 외향적(혹은 내향적)이라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 본다”라고 하소연했다.
사람은 본래 오른손잡이·왼손잡이처럼 성격도 확연히 구분된다고 한다. 오른손잡이에게 주(主)는 오른손이고 부(副)는 왼손이다. 성격도 마찬가지다. 내향적·외향적인 면을 다 갖고 있는데, 성격이 내향적이면 외향적인 면이 ‘부’가 된다(반대로 성격이 외향적이면 내향적인 면이 부가 된다). 이 둘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을 ‘심리적 양손잡이’라고 하는데, 많은 리더가 이같은 심리적 문제를 겪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공 궤도를 밟아오면서 ‘부’에 대한 지적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그 지적이 잦을수록 그 혼동은 더 심화된다고 한다.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
‘가면놀이’ 잘하는 리더들 심리학 용어 중에 ‘페르소나’가 있다. 우리말로 ‘가면 인격’쯤으로 해석된다. 사람이 완장을 차거나 가면을 쓰면 행동거지와 말투가 달라지는 심리적 변화를 뜻한다. 대부분의 리더는 이 페르소나에 뛰어났다. ‘역할 동일시’를 아주 적절히, 원활히 수행했던 것이다. 예컨대 가정에서는 아빠 가면을 쓰고 아빠 노릇을, 회사에서는 CEO 가면을 쓰고 CEO 역할을, 사적 모임에서는 친구 가면을 쓰고 친구 행세를 충실히 잘 해온 것이다. 이처럼 가면을 잘 바꾸어 쓰면 심리적으로 강건하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한 가면의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하면 상당한 압박감에 시달린다(그 때문에 노 대통령은 ‘단순하다,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야 했다). 또 사소한 비판에도 초조해지고, 중립적인 자극에도 긴장하거나 심약해진다. “얼마 전 자살한 삼성 부사장도 이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을지 모른다”라고 정 대표는 말했다.

분노의 뿌리를 찾다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와 승승장구한 CEO 최 아무개씨(54). 업무 처리 능력과 설득 커뮤니케이션이 뛰어난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바로 분노감을 잘 표출한다는 것이었다. 그 단점을 고치려 그는 수많은 분노 조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또다시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마인드프리즘을 찾아온 것은 지난해 여름. 그는 주어진 숙제를 충실히 풀었고, 1대1 면접도 신중히 치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분노의 뿌리가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릴 적 어두운 기억이었던 것.

사연은 이랬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두 집 살림을 했다. 당연히 가족을 소홀히 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배다른 동생과 살면서 그의 부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기도를 통해 아버지를 용서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서서히 부친에 대한 증오와 미움을 지워나갔다. 그런데 심리 분석을 해보니 분노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온몸 곳곳에 박쥐처럼 숨어 있다가 발화 원인만 생기면 불쑥불쑥 튀어나와 폭발한 것이다. 

분노의 뿌리를 확인하자 최 사장은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이후 자기 감정에 압도되지 않았고, 들끓는 분노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또 감정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파악했다. 그 결과 자연스레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부하들이 일을 잘못해서 화를 내고, 실수가 많아서 분노한다’는 자기 믿음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 덕일까. 그는 얼굴이 훨씬 밝아졌고, 심심찮게 “연애하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자기 성찰이라는 무기 리더들은 ‘개선 콤플렉스’라는 특이한 이름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자주 받는다. 개선 콤플렉스란 내면의 심리적 경쟁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뜻한다. 이 콤플렉스는 자기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 자신이 언제나 부족하다는 강박증이 지속되면 마음을 통제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결국 리더로서 꼭 필요한 자기 성찰 능력까지 방해받는다. “그러다 보면 타고난 마음결을 억누르느라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발생하고, 자존감은 낮아지고 불안감은 커지는 심리적인 문제까지 겪는다”라고 정 대표는 지적했다.

개선 콤플렉스에 의해 방해를 받곤 하는 자기 성찰은 리더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능력은 보통 사람보다 리더에게 훨씬 더 많다. 다중지능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8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언어, 논리, 수학, 공간 감각, 음악·신체 활동, 인간·자연 친화, 자기 성찰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가운데 한두 가지에서 뛰어나다. 성공한 리더들도 비슷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자기 성찰이다. 정 대표는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많은 리더가 자기 성찰이 뛰어났다”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재능이 직업인 세상에서는 자기 성찰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재능은 빛과 그늘을 갖고 있는데, 종종 그 그늘이 그 사람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기 성찰이 뛰어난 사람은 다르다. 늘 자기 재능의 빛과 그늘을 살펴 고민하고 대응해서 문제를 미연에 방지한다. 정 대표는 “다른 재능이 아무리 특출 나도 자기 성찰력이 낮으면 행복도, 성공도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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