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과 기습 한파로 서울이 꽁꽁 얼어붙은 1월6일 오후 서울 용산구 갈월동. 어린아이를 안은 한 외국인 여성이 종종 걸음을 치다가 4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춥고 배고프다며 칭얼대는 아이를 간신히 달랜 그녀는 이 건물 4층 옥상에 있는 ‘난민인권센터’(www.nancen.org) 사무실로 들어섰다. 두 뺨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던 그녀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사진 석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두 팔다리와 몸통이 찢겨나간 채 끔찍하게 죽은 외국인 시신 사진 한 장과 폭격에 무너져내린 집의 벽돌더미 앞에서 한 노인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진 두 장이다. 그녀는 사진 속 주인공이 탈레반의 테러 공격으로 숨진 파키스탄의 시댁 조카와 시아버지라고 말했다.
 

한국 시민사회 도움으로 고문 후유증 수술을 받았지만 정부의 난민 인정 거부로 절망에 빠진 라이베리아인 조셉 바나사 씨.

올해 스물일곱인 아잠 루카이아 씨는 파키스탄에서 집안이 탈레반의 테러 표적이 된 후 2008년 10월 한국으로 긴급 피난을 왔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가족은 법무부에 난민 신청을 냈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를 전전하고 있다. 남편 칼리드 칸 씨가 한 해 먼저 한국에 와서 파키스탄과 무역업을 했다는 이유로 법무부는 이 가족을 난민보다는 ‘영리 목적 입국자’로 간주해 난민 인정을 불허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지난해부터 한국에서 이산가족 신세로 전락했다. 아잠 씨의 남편은 13개월 된 딸과 아내를 남겨둔 채 경기도 화성에 있는 법무부 외국인보호소에 8개월째 수용돼 있다. 생계를 위해 일하던 인천 부평의 한 공장에서 불법 취업 혐의로 체포된 뒤 벌금 200만원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자 기간이 만료된 칼리드 씨는 이대로 가다간 어린 딸과 아내만 남겨둔 채 탈레반이 그의 집안을 표적으로 노리고 있다는 ‘사지’로 추방당할 판이다.

남편이 구금된 후 생후 5개월 된 딸을 데리고 아잠 씨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인천 지역에 사는 동료 파키스탄인 가정들을 전전하며 구걸하다시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 가족에게 닥친 기구한 운명을 기자에게 눈물로 호소하던 아잠 씨는 악이 받치는 듯 짤막한 영어로 끊임없이 절규했다. “나는 한국에 와서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인생도 남편도 빼앗겼다” “5달된 내 딸은 아빠를 잃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공포와 추위에 떠는 난민 신청자들

난민인권센터 관계자는 아잠 씨와 상담을 마친 후 긴급 구제가 필요한 ‘모자 가족’으로 분류해 아이에게 두꺼운 겨울옷을 제공하고, 모녀가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후원해줄 독지가를 찾아보겠다고 달랜 뒤 그녀를 돌려보냈다. 또 법무부의 난민 인정 불허에 대응해 행정소송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같은 시각 경기도 안산시에 자리한 다문화가족 행복나눔센터 사무실에서는 라이베리아인 조셉 바나사 씨(48)가 연방 흐느끼며 한국 정부를 원망하고 있었다. 조셉 씨는 그의 조국 라이베리아에 내전이 일어나기 이태 전인 1987년부터 부통령 경호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반군에 끌려가 집단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무릎 손상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더 이상 라이베리아에서 살 수 없었던 조셉은 가족과 이웃나라 기니로 탈출해 난민촌 생활을 했다. 하지만 라이베리아 반군이 기니 정부에 난민촌을 문제 삼으면서 기니 정부도 난민에 적대적 태도로 돌변했다고 한다. 결국 조셉 씨는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들의 도움과 한국전쟁 당시 라이베리아 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기에 한국으로 가면 따뜻하게 받아들여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2007년 6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난민 신청을 하고 2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기간 중, 입국한 지 1년6개월 만에 여러 시민단체와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주민센터의 도움으로 고문 후유증을 앓던 무릎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난민 신청자 신분으로 취업조차 불가능한 그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2년 후인 지난해 6월,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법무부 장관 명의의 ‘출국명령서’였다.

그는 억울한 마음에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지고, 현재는 항소를 준비 중이다. 조셉 씨는 인터뷰 내내 “한국 정부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울먹였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케나다, 미국, 덴마크, 노르웨이로 간 사람들은 모두 난민 인정을 받은 것으로 안다. 왜 한국은 안 되나?”라며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을 표하기도 했다. “한국을 사랑해서 왔다”라는 그의 말에는 한국 정부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까지 담겨 있는 듯했다.

한국의 각종 대외 교류가 활발해지는 데 비례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수난받는 난민이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는 여전히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난민이란 그저 먹고살기 곤란해 해외로 떠도는 사람이 아니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난민에 대해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특정 사회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를 피해 조국을 떠난 뒤 귀환하지 못하거나 귀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국은 1992년에 난민협약 및 난민의정서에 가입한 뒤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았다. 난민 인정 제도가 첫 시행된 1994년 이래 2009년 말까지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은 총 2492명이다. 하지만 이들 중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고작 175명이다. 법무부 심사를 통과한 사람이 117명이고, 법무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거절당한 뒤 법원에 행정소송을 내 난민 자격을 ‘쟁취한’ 이가 22명이다. 현재 심사 대기 중인 난민 신청자는 321명이다.
 

경기도 김포 양곡리에 ‘재한 줌머인 연대’라는 공동체를 형성한 방글라데시 소수민족인 줌머족의 난민들.

그동안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버마(미얀마)가 66명으로 가장 많다.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군사정권에 맞서고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 지지 세력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방글라데시에서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소수민족 줌머족 40명, 그리고 콩고와 나이지리아 사람이 각각 13명과 12명씩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우선 F2 비자가 나와 합법 취업이 가능하고, 기초생활수급자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난민 신청 후 보통 2~5년 심사기간을 거치기에 이들은 극한의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직업과 의료 혜택도 못 받는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법 취업으로 내몰린다. 그러다 단속에 걸리면 법무부는 ‘불법 취업 목적으로 들어왔다는 증거를 잡았다’라며 색안경을 끼고 난민 지위를 불허하는 것이다.

이렇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이라 해서 결코 한국 생활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다. 〈시사IN〉은 사실상 한국에 있는 몇 군데 난민촌을 두루 탐방하고 그들의 현주소와 애환을 들여다보았다.

한국 속 숨은 난민 공동체들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양곡리에는 방글라데시에서 인종 차별을 피해 한국으로 온 소수민족 ‘줌머족 난민촌’(재한 줌머인 연대)이 있다. 1월5일 밤 영하 15℃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양곡리 일대 가구 공장에 흩어져 일하는 줌머족 난민 57명 중 20여 명이 한데 모였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 줌머 소수민족을 위한 국제적 인권운동’이라는 플래카드를 단 사무실이다. 이곳에는 어린이 5명, 성인 여성 18명을 포함해 줌머족 57명이 난민촌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들 중 40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고 17명은 심사 대기 중이다.
 

서울 가리봉동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버마 친족 난민들.

방글라데시 서남쪽에 위치한 ‘치타공’ 산악지대는 이른바 줌머인으로 알려진 11개 소수민족의 고향이다. 100만명 정도 인구에 5039제곱마일 크기인 치타공 산악지대는 영국 식민지로 편입되기 전인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 소수민족의 독립된 영토였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 차례로 영토 편입을 당하면서 이들은 치열하게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71년 이후 치타공 지대를 편입한 방글라데시는 12차례에 걸쳐 줌머족을 대량학살하고 그 자리에 벵골인을 이주시켰다. 결국 수많은 줌머인이 해외로 탈출했으며 한국으로 들어온 57명도 그 일원이다. 1994년 첫 줌머인이 한국에 들어온 이래 2003년 13명이 집단으로 난민 신청을 내서 12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다. 이후 조금씩 늘어나 난민이 50여 명에 이른 것이다.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줌머인들은 스스로  숙제가 있다고 말한다. 줌머인의 고통을 전 세계에 알리고, 줌머의 사회 문화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한국 내 줌머인끼리 서로 돕는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재한 줌머인 연대’를 만들어 2002년부터 지금까지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성명서와 기자회견 등을 열어왔다. 또 정기적으로 서울에서 줌머인 문화행사를 갖는다.

난민 인정을 받은 줌머인들이 겪는 고충은 주로 직업과 자녀 교육문제다. 산토스 씨는 “외국인노동자센터에 가면 당신네는 난민이니까 정부 고용지원센터로 가라고 한다. 고용지원센터로 가면 별다른 대책이 없다며 외면한다”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들은 난민에게도 직업 훈련과 상담 기회를 제공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또 한글 교육 및 시민사회 교육을 받고 싶어 줌머인 스스로 강사를 불러서 진행해왔는데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원을 꿈꾸기도 한다.

지난 3년 동안 아름다운재단과 한국불교재가연합 등의 후원을 받아 줌머인 연대를 근근히 이끌어왔다는 로넬씨(43)는 “한국 진보 세력의 지원과 연대에 기대를 많이 했지만 국내 문제가 어려워서인지 우리의 아픔을 들여다보지 않아 무척 가슴 아프다. 오히려 정부가 줌머인을 대부분 난민으로 인정해주고 있으니 어리둥절하면서도 고맙다”라고 말한다.
 

1월5일 서울 버마 대사관 앞에서 아웅산 수치 피켓을 들고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버마 난민들.

줌머인 연대 외에 한국에 자리 잡은 집단 난민으로는 버마 난민이 있다. 전체 60여 명이 인정을 받은 버마 난민은 크게 아웅산 수치 여사의 민주화운동 지지 세력인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와 소수민족인 친족 난민 및 카렌족 난민 등으로 나뉜다. 난민 20여 명으로 구성된 NLD 한국 지부는 1999년 2월 창립한 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등과 연대해 버마 민주화 운동을 벌여왔다. 이들은 주로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았으며 경기도 부천에 사무실을 두고 강연·토론을 하는 한편 미얀마 대사관 앞 1인 시위 등을 벌이고 있다. 

1994년 8월,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NLD 한국 지부 부총무 조모 아웅 씨(36)는 2년간 연수생으로 일한 뒤, 불법체류자로 생활했다. 2000년 5월, 서울 출입국관리소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5년 후 거부당했다. 그 후 아름다운재단의 도움으로 행정소송을 진행해 2008년 9월 대법원에서 난민 인정을 받았다. 그는 난민에 대한 한국민의 몰이해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불법체류자 취급하는 사람이 많고, 공장 취업을 위해 난민에게 발급되는 F2 비자를 보여줘도 채용을 꺼린다는 것이다.

2009년 8월 난민 인정을 받은 초 수아 린 씨(37)는 난민 인정 과정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다. 난민 신청 심사기간에 아무런 지원도 없이 취업을 금지하는 데 대해 “소송을 포함한 난민 심사기간이 길게는 7~8년까지도 걸린다. 결국 굶어죽지 않으려면 불법 취업을 하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난민 심사 과정과 관련해서도 “한국이 난민의 범위를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 같다. 난민 문제에 대해 좀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서울 가리봉동에서는 버마 소수민족인 친족 난민 20여 명이 일종의 ‘친족 기독교 기숙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버마 서북부 지역을 무대로 생활하는 친족은 버마의 대표적 소수민족 8개 중 하나이다. 그동안 소수민족 자치를 요구하면서 군사정부의 박해를 받은 친족도 정치적 난민으로 분류된다.

1999년 한국에 와서 2003년 난민 신청해 2008년에 인정받은 투완상 씨(33)는 양곤에서 대학을 다니다 퇴학당하고 수배된 친족 학생운동가다. 그는 “친족과 카렌족 난민이 한국에 많이 들어온 이유는 기독교 세가 강하고 반정부 독립운동을 활발히 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학 1학년 말에 군사정부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는 듐보일 씨(25)는 법무부에서 난민 인정을 거부해 현재 소송 중이다. 그는 “만약 아웅산 수치가 집권해도 각 소수민족의 자치와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말로 주류인 미얀마족 난민과의 차별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주로 집단 난민 인정을 받은 이들은 한국의 가장 큰 난민 문제로 언어 및 문화 교육, 그리고 자녀교육 지원 부재를 어려움으로 공통으로 지적했다. 그들은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난민과 2세를 상대로 한국어 교육을 지원해주기를 기대했다.

취재도움: 김재욱 인턴 기자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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