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RMY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하루 전 한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투병 파병을 천명했다. 11월18일 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파병 규모에 대해 “언론에 알려진 상식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최소 300명에서 최대 2000명까지 다양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2000명 설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는 것”이라며 부인했다. 아마도 300~500명 규모로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용준 차관보는 “지방재건팀(PRT) 민간 인력이 전체적으로 150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투병 규모는 지방재건팀 인원의 3~4배로 알려져 있다.

이용준 차관보는 이날 우리 군 역할에 대해 “지방재건팀(PRT) 보호가 주 임무여서 탈레반 토벌 등 다른 전투에 참전할 가능성은 없다. 이 점을 (아프간 정부, 나토 등에) 두 번이나 못 박았다”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한국 PRT 주둔 예정지로 파르완 주가 유력하다고 밝혔다. 지난 8년간 미군이 PRT 사업을 해왔던 곳이다. 파병 명분으로 PRT를 내세운 만큼, PRT 사업의 성공 여부는 한국군 안전과도 직결된 중요한 문제다. 정부는 “파르완 지역 민심이 외국군에 적대적이지 않아 안전하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아프간에서 PRT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2007년 여권법 개정 이래 아프간 현지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한 취재진이 없기 때문이다.

PRT 사업, 현지 민심 얻는 데 실패

11월19일 파르완 주 주도 차리카르 시에 사는 시민 몇 명에게 전화 인터뷰를 해보았다. 차리카르는 내년에 한국군 주둔 기지가 건설될 도시다. “미군이 파르완에서 8년간 벌인 PRT 사업이 만족스러운가?”라는 질문에 시장에서 제법 큰 포목점을 한다는 파슈툰족 모하메드 씨(39)는 “미군은 학교도 만들고 도로도 만들지만 아프간 사람을 고용하지는 않는다. 돈을 벌어가는 사람들은 외국인과 고위 관리다. 미군은 부패한 아프간 관리들을 묵인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아프간 사람이 자립해 돈을 벌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시장에 양고기를 사러 나왔다는 그의 친구 레크만 씨(35)는 “우리 파르완의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다. 젊은 사람들이 일이 없어 가족을 부양하기 어렵다. 지난 8년간 미군은 이런 아프간 사람들 고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학교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미군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이런 주민 반응은 3년 전 필자가 현지에서 보고 느낀 주민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자는 2006년 8월 아프가니스탄 파르완 주에서 미군이 벌인 PRT 사업에 동행한 적이 있다. 당시 경험은 왜 PRT 사업이 쉽지 않은지, 미군이 왜 현지 주민의 인심을 얻기 어려운지, 왜 미군이 현지 아프간인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당시 미군과 나토군은 탈레반 소탕을 위해 ‘메두사 작전’을 전개 중이었고 필자는 종군기자 프로그램(임베디드)으로 미군과 함께 움직였다. 당시 미군이 기자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했던 곳이 바로 파르완이었다. 미군은 파르완에서 나름대로 PRT 사업을 잘 진행했다고 자부하며 홍보하려 했다.

미군은 특히 학교와 도로 건설 상황을 자랑했다. 한번은 2개 소대 병력과 함께 차리카르 시 인근 마을을 방문했다. 험한 산악 계곡을 타고 아찔한 외길을 지나 ‘몰리’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전체가 계곡 사이에 놓여 있는데 유독 돋보이는 신식 건물이 있었다. 미군이 새로 세운 학교라고 했다. 하얀색 페인트로 단장한 새 건물이었고 교실이 5개 있었다. 말끔한 칠판과 수도꼭지가 인상적이었다. 이 깊숙한 산골에 학교를 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이다. 미군 PRT 리더인 캠벨 소령은 “이제 여자 아이도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미군 현지인 통역이 마을 사람에게 여자 아이를 모아달라고 말하자 10분도 안 돼 7~10세 여자 아이가 100여 명이나 모였다.

캠벨 소령은 학교를 건설하면서 겪은 고충을 들려줬다. “처음엔 아프간 현지 기업에 입찰을 부쳐 공사를 맡겼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학교가 세워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건축 자재가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중간 관리나 마을 유지가 착복했기 때문이다. 공사계획서에 나온 비용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미군 공병이 직접 현장에 나와 공사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지지부진한 공사 진척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6개월 만에 파키스탄 업체에 학교 건설을 다시 맡겼다. 결국 파키스탄 업체가 파키스탄 인부를 데리고 공사를 재개했다. 재입찰 1년 만에 간신히 학교는 완공됐다. “사실 아프간 현지 업체가 공사를 잘 해줬다면 현지인이 많이 고용되어 그들도 좋고 우리도 민심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라고 캠벨 소령은 말했다.

ⓒ김영미 제공
2006년 8월 파르완에서 미군 PRT와 동행한 김영미 편집위원.

마을에서 돌아오던 길에 차리카르 시내에 들렀다. 차리카르 시는 말이 주도(州都)이지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작은 읍내 수준이었다. 제일 번화한 거리라고 해봐야 우리네 시골에 5일장이 열렸을 때 풍경이었다. 사람과 당나귀가 뒤섞여 거리를 서성였고 이곳 특산물인 포도와 중국제 생필품, 양고기나 갖가지 채소를 팔고 있었다.

“도로 포장 사업은 미군 위한 것”

눈길을 끈 것은 이 외진 도시 주변에 도로가 잘 닦여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이 PRT 사업의 일환으로 포장한 신작로였다. 시멘트도 아닌 아스팔트가 시원하게 깔린 것이 특이했다. 필자는 지나가는 주민에게 “도로가 생겨 마을 사람들이 편리해지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보았다. 주민은 “우린 태어나서부터 당나귀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녀서 이렇게 좋은 도로가 없어도 잘 살았다. 차를 몰 만큼 부자는 파르완에서 아주 소수다”라고 했다. 필자와 동행했던 미군 헤그 상사는 “솔직히 도로 포장 공사를 먼저 하는 이유는 도로 매설 폭탄(IED)를 막기 위해서이다. 그동안 IED에 희생된 미군이 너무 많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애초 동기와 상관없이) 아프간 사람들도 이 도로를 이용하면 편하지 않겠느냐”라고 덧붙였다.

미군은 PRT 사업을 진행하면서 마을 정보 수집 활동도 병행해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14개월 동안 파르완에서 PRT 임무를 마치고 지난 9월 고향으로 돌아온 82공수사단 특수부대 소속 그렉 하벨만 하사는 PRT 사업의 이면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내 주 임무는 PRT 사업이지만 탈레반이나 탈레반 동조 세력에 관한 정보 수집도 같이 했다.” 그의 팀은 재건 임무를 위해 마을을 방문할 때면 수색과 정보 수집 임무도 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를 세워주면 아프간 사람들이 미군에게 고마워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날, 미군의 잦은 수색에 불만을 품은 파르완 주민 수십 명이 화를 내면서 하벨만 하사 팀에게 돌을 던지며 거리로 뛰어나온 사건이 발생했다. 하벨만 하사는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그 사건 이후 더는 그 마을에서 정보 수집과 PRT 사업을 진행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파르완 주민 처지에서는 학교를 세워주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빌미로 군사 첩보 활동을 하려던 미군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부패한 카르자이 정권에 반대하는 파르완 주민들이 지난 7월 야당 대선 후보 압둘라 압둘라를 응원하는 모습. 8월20일 대선은 부정으로 얼룩졌고 압둘라 압둘라 후보는 대선 결선 투표를 보이콧했다.

아프간 민간 방송 아리아나 TV 기자로 파르완에 상주하는 파이샬 씨는 “미군이 PRT라는 간판 뒤에서 정보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주민은 상처를 받았다. 학교 설립을 탈레반 정보 획득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생겼다”라고 말했다. 

파르완 주에서는 2005년 5월 대규모 반미 시위가 열렸다. 북부 지역인 파르완·카피사·타하르 등에서 시위에 참가한 시민이 수천 명에 달했다. 이 시위는 미군이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였다. 파르완 주 차리카르 시에서도 시위 인파가 모여 “미군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아프간 신문 ‘카불 타임스’ 파르완 지국 기자인 예나에슈 씨는 이렇게 정세를 설명했다. “지난 8년간 파르완에서 미군 PRT 사업은 주민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그 정점이 2005년 벌어졌던 반미 시위이다. 미군의 재건 사업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주민들은 생각한다. 미군과 공조한 부패 관리도 미워한다. 지역 관리에게 PRT 사업은 돈을 뜯어낼 좋은 기회다. 어떤 공사든 지역 행정관리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서 공사를 강행하는 미군과 이를 악용하는 관리 모두를 경멸한다.” 카르자이 현 아프간 대통령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까지 연루된 ‘부패 공화국’ 아프간에서 미군 PRT는 테러와의 전쟁보다 무서운 ‘부패와의 전쟁’을 벌인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앞으로 한국군 PRT가 파르완 주에서 겪어야 할 상황의 전주곡이다. 한국군이 PRT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려면 이 ‘부패 문제’ ‘실업난’ 등을 극복해야 한다. 미군은 지난 8년간 파르완에서 학교를 짓고 집을 짓고 도로를 내는 동안 군인 43명을 잃었다. 한국 PRT 관계자들이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탈레반이 도로 건설업체를 공격하는 까닭

최근 한국 건설업체 삼환기업이 무장 세력에게 네 차례 공격받고 현지 직원이 사망했다. 삼환기업은 파르야브 주에서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한다. 외교통상부는 11월19일 “현지 하청업체 간의 알력 싸움이 원인으로 여겨진다”라고 밝혔다. 반면 현지 경찰은 탈레반의 소행으로 여긴다(〈시사IN〉 제114호 참조).

현지 경찰이 탈레반을 지목하는 배경에는 도로 매설 폭발물(IED)을 둘러싼 전투가 있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간에 들어간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도로 포장이다. 미군 사망 원인 1순위가 IED 공격이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도로 포장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건설업체를 목표로 공격을 일삼았다.

아프가니스탄 모마키 계곡에서 공사 중인 중국 업체의 도로건설 현장이 대표 사례다. 중국 국영기업 시시주 그룹은 와르다크 지방의 모마키에서 약 53km에 달하는 도로 포장 공사를 하고 있다. 사업 규모만 5000만 달러다. 그런데 탈레반 공격이 이어지자 공사가 중단됐다. 결국 보다 못한 미군이 중국인 노동자 보호를 위해 나섰다. 아프간 주둔 미군 보병 87연대는 건설 현장 경계 근무를 하며 중국 인부를 보호한다.

미군 87연대 2분대장인 키모 갈라후에 중령은 “아스팔트 도로는 미군에게 일종의 무기다”라고 말했다. 한 주민은 “그전에 이 도로에서 많은 폭탄이 터져 미군들이 많이 다쳤는데 그 뒤로 미군이 이 도로를 깔기 시작했다. 아마 폭탄을 파묻지 못하게 하려고 아스팔트를 까는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을 ‘아메리카 도로’라 부른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