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은 1980년대의 치열한 사상 논쟁에서 잔뼈가 굵은 철학자다. 언론계와 학계를 거쳐 참여정부에서 국정홍보처장을 지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몇 개월 동안 함께 ‘진보의 미래’를 연구했던 사상적 동지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최근 ‘진보’를 주제로 책(〈다시 진보를 생각한다〉)을 내놓았다. 일정한 철학·사상적 플랫폼을 기반으로 진보정치의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은 "지역정치의 강화로 진보를 재구성하자"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개월 만에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냈다.
지난해 캐나다에서 귀국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함께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성장 중심 사회’에서 ‘복지 중심 사회’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그때 나는 “과거에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사회에 권력을 행사했지만, 현대 국가에서는 권력 개념이 점점 더 거버넌스(국가가 권력의 일부를 시민사회에 이양해서 국가·시민사회가 협력해 통치한다는 개념)로 바뀌고 있다”라고 말씀드렸다. 과거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진보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이런 토론을 통해 우리의 주제는 (국가의 역할에서) ‘진보의 미래’로 전환되었다. 이런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다 사고를 당하셔서 한동안 망연자실하고 있다가 불현듯 ‘안 되겠다. 책을 서둘러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책은 노 전 대통령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렇다. 함께 논의한 것의 결과물인 만큼 노 전 대통령의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계승되고 녹아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왠지 읽다보면 누군가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는 느낌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진보세력 측의 날선 비판이 그토록 억울하고 안타까웠던 걸까.
보수언론의 공격은 어차피 황당한 억지가 많았다. 그러나 진보 측의 비판은 노 전 대통령이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가장 가슴앓이 했던 것이 바로 양극화 문제였다. 양극화란 것은 전 지구적 현상이다. 한 나라의 정부 처지에서는 해결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정우 당시 대통령자문위원장도 한겨레 칼럼에서, 막상 정부에 들어가 보니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마땅한 수단이 없더라고 술회한 적이 있지 않나. 그러나 양극화가 참여정부 시기에 심화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부른 속내는, 이 문제에 만족스런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짙은 회한이다. 다만 참여정부는 양극화에 대해 복지를 늘려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물론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진보진영이라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비판하면서 ‘야! 모두 네 책임이야’, 이렇게 툭 던지고 말 것이 아니라 함께 대안을 찾자는 생각을 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진보진영의 일원으로 간주했던 것일까.
그렇다. 그래서 “나의 실패를 진보진영 전체의 실패로 호도하지 말라”고 했던 거다. ‘나는 실패했지만 진보세력 전체의 실패나 비전 상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진보의 미래’를 연구했던 거고.

지난 2006년 '국민과의 인터넷대화'를 통해 양극화 문제를 얘기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러나 진보세력은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오지 않았나. 예컨대 부자 증세, 복지재정 확충, 노동시장 안정화….
글쎄. 세금이란 거, 사회적 권력관계의 총체다. 대통령이 방망이 두드린다고 증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둘러싼 여러 세력의 정치적·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현재 상황대로라면, 진보가 다시 집권해도 부자 증세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은 없을 거다. 또한 당시 비정규직 입법(비정규 형태의 고용은 2년 뒤 자동적으로 정규직화)의 경우, 물론 기업 처지에서는 2년 되기 전에 해당 비정규 노동자를 잘라버리면 되니까, 어떻게 보면 피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줬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시장경제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다. 물리적 힘과 언론·대학·이데올로기까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가능했을까. 당시에도 비정규직 입법이 통과되자마자 이랜드가 해당 노동자들을 일거에 해고해버리지 않았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일종의 사보타지였다. 분규가 일어나자 법무부 쪽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조기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다른 대통령 참모들은 사측의 문제가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시 법무장관이 나중에 보수언론에 ‘자신은 엄정한 법 집행을 하려고 했는데, 소수의 진보적 참모들이 막았다’고 해서 웃고 말았다. 비정규직 입법 하나로도 이토록 복잡한 사태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진보세력은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주도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당신의 논리는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 양극화’라는 세계적 대세에 맞섰으나 힘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제도적 진보’는 성장과 개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집권한 대통령 처지에서 경제성장이란 의제를 배제하고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성장을 배제하지 않으면,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란 문제가 도출되는데, 그 동력 중 하나가 개방일 수 있었던 거다. 이걸 신자유주의로 비판하지만, 글쎄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냐, 아니냐’가 아니다. 이런 비판은 추상적이고 현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자로 지칭한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
 과거의 진보적 과제는 주로 정치와 경제 부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봤듯이 ‘불안한 식품으로부터의 해방’ ‘다양성’ ‘자신의 취향이 보호되고 방해받지 않을 권리’ 등이 부상하면서 진보의 의제가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방식으로 진보를 재단하고, 특정 가치만을 ‘유일한 진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보의 특권화’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게 진보야. 다른 주장 하는 놈들은 다 신자유주의자야. 까불지 마’, 이런 태도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라는 이념적 명분을 세워 자신을 다른 세력으로부터 차별화하면서 현실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보세력이 ‘경제성장’이나 ‘시장’ 등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장과 개방, 성장 등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피해서도 안 된다. 성장과 시장과 자유주의를 포용하지 못하면 진보는 생존할 수 없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다. 한국의 보수가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해본 적이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반공주의와 파시즘 아닌가.

하긴 한국의 보수세력은 투명한 시장주의를 하기에는 자신들끼리 지나치게 의리 있는 집단인 것 같다. 공기업 이사를 임명하는 것만 봐도 시장주의 보다 자신들의 인간관계와 연고가 먼저다.
시장의 기본 원칙, 즉 투명성이나 합리성 같은 가치를 지키지 않는 거다. 미국을 봐라. 1930년대 공황은 소수 초거대 기업의 시장독점과, 금융·산업 유착, 정경유착 때문이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부터는 독점과 연고주의를 막기 위해 공정거래 제도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시장주의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왼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진보의 미래를 함께 연구한 사상적 동지이기도 하다.
당신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아마도 ‘진보정치는 지속 가능한가’일 것이다. 참여정부가 집권 기간 내내 이런저런 사회세력에 흔들렸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우선 의문을 던져보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 년 간 축적한 민주적 성과가 이토록 쉽게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진보세력이 시민공동체에 뿌리박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민공동체란 뭔가.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한때 한국에서는 도시의 자영업자들이 개혁세력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여촌야도(與村野都)라고 했다. 이제 자영업자가 전체 가구의 3분의 1에 이른다. 그런데 음식점이 100곳 창업하면 이 중 95개가 망하는 상황이니까 자영업자들은 생존에 격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자영업자 층이 지역주의에 골몰하고, 보수언론을 옹호하며, 개발주의에 열광한다. 이분들 처지에서는 부동산 경기라도 살아야 밥집이 되고, 옷집이 되며, 커피숍이 될 것 아닌가. 이처럼 중앙정치의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 지역의 기층에는, 개인들의 생활과 소통에 기반한 공동체가 있는 거다. 이런 공동체 중 상당수가 보수 쪽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진보 성향의 시민은 구청이나 동의 사무 업무를 누가 어떻게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지만 보수는 그렇지 않다. 라이온스와 골프 클럽, 부녀회와 노인회 등의 ‘공동체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시민공동체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보수의 헤게모니 아래에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이런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정당 차원에서 선거 한 번 이기느냐, 지느냐는 별 것 아니다. 이런 구조가 유지되면, 설사 어떤 진보세력이 집권하더라도 항상 불안하고 단명할 수밖에 없다. 진보가 허약한 이유는 이런 공동체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시민공동체의 역관계는 그대로 지방의 정치권력에 반영된다. BBK 특검법이 논란이 되던 당시 한나라당에서 내린 동원령으로 지역 구의원, 시의원 5000여 명이 국회를 에워싼 적이 있다. 나는 한국 보수의 핵심 주체가 이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보세력도 그동안 시민운동을 열심히 해오지 않았나.
문제는 진보세력의 시민운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 즉 시민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란 말도 있지 않나. 그러나 그동안 의미 있는 공동체 운동이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생태, 생협, 마을, 소비자, 문화, 관심, 취미 등 삶의 요구에 기반한 부문에서 공동체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또 최근 들어 새롭게 등장하는 사이버 공동체들이 있다. 예컨대 쌍꺼풀과 코수술한 여성들의 사이트인 ‘쌍코’, 하이힐 모임인 ‘킬힐’, 요리 모임인 ‘파리쿡닷컴’ 등 인터넷 커뮤니티가 그것인데, 이들은 촛불집회의 핵심 동력이기도 했다. 취미 때문에 모인 공동체가 정치 의제와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다. 이 같은 공동체들에 시민운동과 정치적 의제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지역정치와 결합되어야 안정적인 진보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지난 2003년 취임 선서를 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최근 발기인 대회를 가진 국민참여당이 핵심 인사들을 내년 지방선거에 내보낸다고 들었다. 당신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이야기다.
대중들은 지난해 촛불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상황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강력한 제도가 이를 가로막았다. 더욱이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촛불시위나 선거 때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구조를 단지 정당으로만 바꿀 수는 없다.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도 지금은 진보의 동력이 되기 힘들다. 그렇다면 결국 대안은 생활공동체와 지역정치에서 새로운 동력을 재생시켜 제도를 바꾸는 거다. 지방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시민공동체가 작동하는 공간이 지역정치이기 때문이다. 진보세력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주로 중앙정치만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정치는 민주화와 진보의 빈 공간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남아 있다. 정당만 만들고 부수고 한다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정치를 통해 진보의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민참여당을 대표하는 스타급 인물들도 동의하는 이야기인가. 그들이 지방선거에 출마하려고 할까.
시민공동체와 지역정치를 한층 더 미래지향적이고 민주적이고 진보적으로 재구성하려면 좋은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 지역의 공동체운동, 시민운동, 노동계, 교육계 등에서 좋은 후보를 발굴해내야 할 것인데, 필요하다면 참여정부의 인적 자원들도 이런 ‘아래로부터의 연대’의 한 축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대선 후보들도 기초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참여정부 세력들 간에도 생각의 편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 자체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중요한 것은 ‘감동 있는 연대’이다.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철저히 희생하는 정치를 통해 대중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의 맥락에서 몹시 의미심장하다. 노 전 대통령도 지방선거에 출마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이전부터 봉하로 가겠다고 했다. 그 뜻을 잘 생각해보라. 중앙정치 무대가 아니라 봉하라는 시민공동체에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뜻 아니었을까. 더욱이 그는 생명을 던져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방어하려고 한 인물 아닌가. 내가 지방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을 털어놓았더니 노 전 대통령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쉽겠나. 그러나 잘되면 나도 뭐 김해 시의원 출마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만 그가 말한 ‘출마’라는 용어의 함의는, 구체적으로 지방선거에 나가겠다는 의사표현이라기보다 ‘내가 힘 좀 보태줄게’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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