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에 바람이 분다. 햇밀이 출렁인다. 햇살 받은 햇밀은 보송보송 빛난다. 밀밭 사이를 한 아이가 뛰어간다. 그 위로 자막이 떠오른다. “우리밀에 우리 미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봐서는 영락없이 농촌 살리기 캠페인 광고 같다. 그런데 아니다.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베스킨라빈스 등 익숙한 대기업 브랜드가 이어 등장한다. “우리밀 사랑, SPC가 함께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SPC 그룹은 이들 브랜드를 거느린 전문 식품 기업이다. 지난해 우리밀 가공 전문업체인 ‘밀다원’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우리밀 시장에 뛰어들었다.

SPC 그룹뿐만이 아니다. CJ제일제당, 동아원 등 대기업 또한 우리밀 사업에 눈을 돌렸다. 제분·사료 전문업체인 동아원은 내년까지 우리밀 시장 점유율을 60%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우리밀 부침가루’ 등을 출시해 인기를 끈 CJ제일제당 또한 2014년까지 우리밀 가공 사업을 12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돌이켜보면 놀라운 반전이다. 지난해까지 우리밀 자급률은 고작 0.3%였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우리밀이 명맥을 유지해온 데는 생협과 민간단체 등의 도움이 컸다. 특히 생협은 조합원들이 우리밀 생산에 필요한 밀 수매자금을 모아 생산자(농민)에게 1년 전 미리 건네는 식으로 계약 위탁 재배를 함으로써, 농가가 안심하고 우리밀을 심을 수 있게끔 해왔다. 이렇게 지켜온 우리밀에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올해 밀 자급률은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높아진 0.6%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iCOOP생협지난 5월 아이쿱생협이 순천만에서 주최한 ‘우리밀 살리기 한마당’.
이를 바라보는 생협의 속내는 복잡하다. 조완형 한살림 상무이사는 대기업의 우리밀 시장 진출에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밀 자립 기반이 튼튼해지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본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하는 소리도 들린다. 당장 시작된 우리밀 수매 경쟁부터가 자금력 약한 생협에는 부담이다. 동아원은 한국우리밀농협협동조합과 구매 계약을 체결해 내년 우리밀 1만5000t 수매를 완료했다고 10월 초 밝혔다. 최근 전라남도와 우리밀 산업화를 위한 업무협정을 맺은 CJ제일제당은 2010년 우리밀 수매량을 올해 5000t에서 1만2000t으로 2배 이상 늘려 잡았다. 두 업체 수매량만 따져도 올해 우리밀 생산량(2만2000t)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과정에서 생협과 계약했던 일부 농가가 다른 거래처에 밀을 처분해 필요한 수매량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오항식 아이쿱(iCOOP)생협연합회 사무처장은 말했다.

대기업과 생협 간에 벌어진 ‘우리밀 신경전’은 2009년 생협의 현 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밀뿐만이 아니다. 생협의 주력 품목이었던 친환경 농산물 시장에도 대기업이 적극 뛰어들고 있다.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가면 친환경 농산물 코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2008년 친환경 농산물 시장 규모는 2조4000억원으로 늘었다. 전체 농산물의 7.8% 수준이다.  

물론 대기업이 뛰어든다고 생협 입지가 당장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몇 년 사이 생협 약진은 눈부시다. 생협의 맏형 격인 한살림은 연내 조합원 수 2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두레생협 김기섭 상무이사는 “지난해 광우병·멜라민 파동 이후 조합원 수나 매출액이 40~50% 가까이 뛰어오른 데 이어 올해 좋지 않은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 증가세가 전혀 꺾이지 않아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생협의 고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려는 생협의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일각에서는 이 과정에서 국내 생협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살림·아이쿱생협연합회·두레생협 등 3대 주요 생협이 선택한 3색 생존법을 알아본다.

 

ⓒiCOOP생협대기업들이 일제히 우리밀 시장에 뛰어들면서 일부 생협은 밀 수매량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아이쿱생협은 9 ~11월 조합원 특별증자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이쿱생협연합회-대기업과 맞장 뜨기

지난 9~10월 고성옥 아이쿱생협연합회(아이쿱) 사무관리팀장은 전화기에 매달려 살았다. 아이쿱 조합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조합원 특별증자’를 설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생협과 마찬가지로 아이쿱에 처음 가입하기 위해서는 3만원 이상의 출자금과 별도의 조합비를 내야 한다. 그런데 출자금을 또 내라니, 왜?

조합원 특별증자는 아이쿱이 야심차게 던진 승부수이다. 1998년 21세기생협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범해 지난해 이름을 아이쿱으로 바꾼 이 생협이 전체 조합원을 상대로 출자금 증자 운동을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큰 이유라면 대기업, 그중에서도 특히 대형 유통업체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실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생협도 일정한 규모를 갖춰야 매장이나 생산자·소비자를 대형 유통업체에 뺏기지 않는다”라고 오항식 사무처장은 말했다.

아이쿱은 생협과 달리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표방하는 것은 ‘서민들도 저렴한 가격으로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생협’이다. 아이쿱은 매장 인테리어나 진열에도 공을 들이는 편이다. “대형마트 같은 데 익숙해진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라고 오 처장은 말했다. 10평짜리 매장보다는 정육점·베이커리·식품을 한 장소에서 살 수 있는 대형 매장을 선호하는 게 일반 대중의 현실이고, 그렇다면 생협이 이런 욕구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2009년 10월 말 현재 아이쿱 오프라인 매장은 전국 70곳에 달한다. 2007년 첫 매장을 연 생협치고 눈부신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들은 민간 기업과는 다른 맥락에서 ‘규모의 경제’를 지향한다. 오 처장은 “최소한 생협 조합원이 50만 가구 이상은 돼야 안정된 기반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2000만 가구 이상이 생협에 가입하고 있다는 일본만큼은 아닐지라도 이 정도 규모가 돼야 생협이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경제적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9월 말 현재 아이쿱 조합원은 7만5000여 명이다). 이들은 또 유통 구조를 혁신함으로써 대기업과도 맞설 수 있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을 실현 중이다. 2011년까지 충북 괴산에 ‘친환경 유기식품 클러스터’라는 물류·생산 거점을 조성해 생협 물품의 가격 및 품질 경쟁력을 극대화하겠다고 아이쿱은 밝혔다.

그러자면 문제는 자본이다. 그런데 생협은 주주 따로, 소비자 따로 있는 구조가 아니다. 생협 조합원이 주주이자 소비자이다. 따라서 이런 구조를 갖추는 데 주인인 조합원 스스로 나서달라고 호소하게 된 것이라고 고성옥 팀장은 말했다. 이렇게 안정된 구조를 갖춤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은 주주이자 소비자인 조합원에게 돌아간다.

아이쿱 특별 증자는 11월 중순께 마무리된다. 아이쿱은 이번 특별 증자에 조합원 6만명가량이 참여해 총 18억원가량을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대기업 자본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액수지만 오항식 처장은 이것이 가을철 수매 자금 부족을 해소하고 생협의 재무 건전성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쿱의 이 같은 공격적 경영 방식은 다른 생협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기업을 흉내내고 있다는 비아냥도 종종 들린다. 그렇지만 시장 상황이 바뀔 경우 언제라도 농민을 이용하다 버릴 수 있는 대기업과 달리 생협은 얻은 이득을 생산자·소비자와 고루 나눌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아이쿱 조합원 김지원씨(37, 주부)는 말했다. 이번에 100만원 증자를 약정했다는 김씨는 “미래에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증자에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한살림은 ‘가까운 먹을거리’ 캠페인을 전개 중이다.
한살림-긴 호흡으로 내다보기

10월 말 현재 한살림 전국 조합원 수는 19만270명이다. 1986년 서울 제기동 한 쌀가게(한살림농산)에서 출발한 한살림이 조합원 20만명 시대를 목전에 둔 셈이다.

여느 기업이라면 떠들썩할 법한 사건이건만 정작 한살림은 조용하다. “최근 몇 년간 한살림이 급성장한 것은 우리가 잘해서라기보다 식품 안전 파동 등 외부 요인 덕이 컸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 내부의 역량과 한계를 돌아볼 때라고 본다”라고 한살림 부설 모심과살림연구소 정규호 연구원은 말했다. 지난 10월28일 남산문학의집에서 열린 ‘한살림 선언 20주년 기념 모임’은 이런 자성을 다지는 자리였다.

‘한살림 선언’은 1989년 고 장일순 선생과 박재일 한살림 회장, 김지하 시인, 최혜성씨 4명이 발표한 것으로 한살림 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일종의 헌장이라 할 수 있다. “시장경제란 돈을 모시는 것이지, 생명을 모시는 게 아니다”라는 장일순 선생의 일갈이 드러내듯, 선언은 이런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몰고 올 문명적 위기 상황을 예견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친환경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에서도 한살림은 오히려 ‘너도나도 친환경을 외치는 시대’의 이면에 주목하고 있다. 조완형 상무이사는 “지금처럼 가면 3년 이내에 친환경 농산물 과잉 시대가 올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되면 피해는 농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일깨우고 지역 순환을 강조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 밥상을 살리고, 농업을 살리고, 지구(생명)를 살린다’는 한살림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데서 생산한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로컬푸드 캠페인, 일명 ‘가까운 먹을거리’ 운동이 대표적이다.   

20년 전 ‘한살림 선언’을 대표 집필한 최혜성씨.
한살림 조합원 김경란씨(39, 주부)는 요즘 매장에서 물품을 살 때마다 영수증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오늘 내가 절감한 온실가스량’이 영수증에 찍혀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산콩으로 만든 순두부를 사면 콩 생산에서 두부 유통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100km에 불과한 만큼 미국산 콩(이동 거리 1만9736km)으로 만든 두부를 산 것에 비해 CO₂ 발생량을 138g 줄였다는 결과가 표시되는 것이다. 이는 ‘형광등을 16시간 끄는 효과’에 맞먹는다는 것이 순두부 제품 포장에 적혀 있는 친절한 설명이다. 정규호 연구원은 이렇게 일상에서부터 조합원들이 바뀌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협은 기본적으로 대안적 가치와 시스템을 추구하는 운동 조직인 만큼 긴 호흡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조합원들의 의식과 삶의 양식이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두레생협-‘착한 소비’를 넘어서기

“커피 재배만으로는 농민이 자립하기 어렵다. 쌀 농사를 새로 시작하고 양계장을 설립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다니엘 페레라, 동티모르 KSI) “팔레스타인은 ‘커다란 새장’ 같은 상황이다. 좁은 공간에 난민들이 모여 산다. 그렇지만 구호만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들이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와달라. 올리브유 착유·가공 시설과 창고를 짓는 데 돈이 필요하다.”(할레드 히두미, 팔레스타인 농업개발위원회)

지난 10월9일 서울에서 열린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창립총회’에서는 제3세계에서 온 생산자들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들 생산자는 두레생협 조합원들에게 낯설지 않다. 지난 2004년부터 두레생협이 이들과의 공정무역을 통해 설탕(필리핀), 올리브유(팔레스타인), 커피(동티모르) 등을 국내에 들여왔기 때문이다. 두레생협 55개 매장(회원 수 5만7000명)에 가면 ‘팔레로스의 희망’ ‘팔레스타인의 평화’ 따위 상표명이 붙은 이들 물품을 만날 수 있다.

필리핀·동티모르 등 제3세계 국가 농민들이 한국 생협에서 판매 중인 자신의 물품을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생협은 공정교역 물품을 사 쓰는, 이른바 ‘착한 소비자’ 노릇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한국의 두레생협·한살림과 일본 생협 10여 곳이 손잡고 ‘아시아 민중기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날 아시아 민중기금 의장으로 선출된 후지타 가즈요시 씨(일본 ‘대지를 지키는 모임’ 회장)는 “지난 20년간의 교역 경험을 통해 제3세계 생산자에게 어떤 시설과 자금이 필요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이들의 자립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아시아 민중기금은 2012년까지 12억원 이상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며, 매년 4억원가량을 신청 단체 상황에 맞게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재 아시아 민중기금에 융자를 신청한 곳은 5개 나라  9개 단체이다. 이를테면 동티모르는 양식장과 훈련센터 건립, 필리핀은 곡물 정비 사업과 가내 수공원업 지원에 필요한 돈을 요청했다.

김기섭 두레생협 상무이사는 ‘시혜’가 아닌 ‘호혜(互惠)’ 차원에서 기금이 설치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설탕·커피·올리브유 같은 것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품목이 아니다. 이런 먹을거리를 안전한 상태로 즐기고 싶다면 제3세계 생산자와 ‘신뢰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 돈 몇 푼 집어준다고 될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안정적인 자립 기반을 갖출 수 있게끔 기금을 지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농촌도 죽어가는데 제3세계 살리자는 건 배 부른 소리라는 비판도 있다. ‘굳이 설탕을 먹어야 하냐. (국내에서 나는) 조청을 먹으면 되지’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생산자(농민)도 있다. 이런 이유로 두레생협은 제3세계와의 교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도시 소비자가 아니라 농촌 생산자부터 현지를 돌아보게 했다고 한다. 필리핀 네그로스의 사탕수수 농장이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돌아보고 온 농민 스스로 교역 찬성자로 변했다고 한다. 농민들은 “내가 가진 농사 기술 좀 전수해주고 싶더라”며 안타까워했다. ‘물품’ 대신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도시 조합원들에게도 민중기금은 ‘호혜적 소비’를 실험하는 새로운 장이다. 일본 생협의 경우 일반 바나나는 6엔, ‘민중기금 마련용 바나나’는 9엔 하는 식으로 가격을 매겨 조합원으로 하여금 선택을 하게 한다고 가즈요시 씨는 전했다. 그런데 조합원 상당수가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9엔짜리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김기섭 이사는 “전지구적인 기후 변화·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일국적 접근만으로 안전한 먹을거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생협 운동도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힐 때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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